안종화 감독의 흑백 무성 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를 김태용 감독이 새롭게 연출한 ‘청춘의 십자로’를 봤다.  [무성 영화 + 조희봉 변사의 일인다역 열연! + 라이브 사운드 트랙 연주 + 영화 중간 중간 영화 주연 두 명의 역할을 맡은 뮤지컬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가 어우러진, 신기하고 즐거운 ‘쇼’였다.  (김군 고마워!)  필름으로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라고 한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1934년 9월 21일자 동아일보 정기발행(조간) 6면 중 6면
1934년 9월 21일자 동아일보 정기발행(조간) 6면 중 6면

(spoiler alert) 잘 보면 이 기사는 ‘칭찬 – 지적 – 칭찬’ 구조로 은근히 까고 있다.  중간에 끼어있는 솔직한 부분:

“(…) 그러나 욕심대로 말하게 한다면좀더 힘들이고 좀 더 머리를썻으면 하는 개소도 없지 아니 하다.  라스트에 잇어 기도하는 장면같은것은 애써 해피엔드의 맹랑한 기분을 내려한것이겟지마는 좀 천박한 느낌이 잇다. (이것은 아마 뒤에 커트하엿으리라고 생각하지 마는 시사실에서 본대로를 말해둔다).  그러고 농촌빈가의 처녀로서의 신일선씨의 분장이 모던껄그대로인것, 주역 이원용씨가 클라이막쓰에서 좀더 박력잇는 연기를 보여주지못한것, 혼인잔치와 연회장같은 군중장면의 빈약한것등을 들수가잇겟다. (…)”

시골에서 상경한 신일선이 왜 모던걸처럼 나오냐고 하하하~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글쓴이가 추후 편집해버렸을 것이라 생각하는 라스트 기도 장면은 그대로 있었다.  해피엔드가 아닌 영화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가는 지금보다 후했을지 궁금하네.  영복은 무력으로 계순과 동생 영옥을 되찾아오긴 했지만 앞으로 이 셋이 함께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돈이 갑자기 생길 리 없다.  세 인물이 겪는 근본적인 비극은 모두 돈 때문이며, 영화가 비춰주는 그 시대 사회는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재력에 따른 계급사회에서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각자 무진장 노력해야 하는 시점이 바로 이 영화의 엔딩이다.  언젠가 서로를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엇갈린 십자로에서처럼 이번에도 각자 반대 방향으로 떠나야 하는….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며 희극적 요소와 즐거운 연출에 많이 웃었어도 영화 자체가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영복은 프레임 왼쪽으로, 계순은 오른쪽으로 걸어나가버려서 우리는 이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Charles Chaplin의 ‘Modern Times(1936)’는 ‘청춘의 십자로’ 경성 개봉 2년 후에 나왔다.  엔딩에서 채플린과 소녀는 팔짱을 끼고 발을 맞춰서 같이 간다.  물론 그 앞에 집은 커녕 말그대로 첩첩산중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뭐가 있는지 보이고, 암지 나올 때까지 둘은 함께 있다.  영복이와 계순이는 안 될거야 아마 흑흑….

* * * * *

여기서부터는 그냥 딴 얘기.

* 영화를 지난 달 말에 보았으니, 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지 78년 지나서 본 거다.  78년!!!  78년 동안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나.  영화 개봉 당시 1934년은 일제 강점기였다.  기사가 실린 신문을 앞뒤로 뒤적뒤적 하다가 일러스트레이션을 보게 됐는데, 그날자 신문에서 가장 앞쪽에 나온 일러스트는 아래와 같았다.  당시 공식적으로 일본어를 썼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본 스타일 삽화와 광고를 보니 일본어로 표기된 광고 표제보다 더 직접적으로 일제치하의 영향이 느껴졌다.  특히 맨 오른쪽 여자 그림은 뼛속까지 일본 여자 같아서 깜짝 놀랐다. 가운데 광고에서는 ‘우리의 명절’에 ‘아지노모도(뭔 뜻이지?)’.  한자와 일본어를 모르면 이날 1면 톱기사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건 같은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읽을 수 없었겠지.  그런 기사엔 그림도 없음.

1934년 9월 21일자 동아일보 정기발행(조간) 6면 중 2면

** 그치만 기사 본문은 물론이고 광고에 쓰인 다양한 typeface는 예쁘다….

*** 걸어가면서/뛰어가면서 끝나는 영화 모아보고 싶네.  제보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