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혹은 필요한 만큼 예민하거나 섬세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른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인식을 하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무던한 건지 덜렁이 스머프 같은 성격 때문인지 하여간 남들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어도 나중에 “어, 그랬어?” 싶은 순간이 잦다.  그래서 요즘도 처음 겪는 작은 일들이 있는데, 그건 대부분은 실제로 처음 겪는 게 아니라 여러 번 겪었는데도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경우다….

세상에는 ‘첫’이라는 접두어가 붙는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거창하게 다가오는 추상적 개념이 얼마나 많은지 – 예를 들어 첫사랑 같은 거?  그런 거 말고, 총체적 판단을 하기 전 단계, 그러니까 내 사고가 경험을 가공하기 전의 날감각이 받아들이는 주관적 첫경험이 내게는 훨씬 의미가 있다.  가끔 그런 첫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에는 기쁘다기보다 오히려 슬픈 쪽에 가까운 날카로운 손가락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지각하는 총체적 감각 세계 동영상의 pause를 누른 것처럼 잠깐 멍해진다.  그리고 곧바로 그 순간을 딱 한 번만 더 겪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그런 순간을 ‘우연히’ 반복할 수는 없고 ‘의도적으로’ 재연하려 해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으니 사실은 같은 행동이 아니다.  아쉬운대로 머릿속으로 며칠 동안 그 순간을 반복재생하곤 한다.  매우 짧아서 며칠이면 수천 번 정도 반복할 수 있다.

트레이에서 막 꺼낸 판화지에 작은 먼지가 하나 붙어있었다.  물에 담궜던 종이를 꺼내는 그 짧은 순간에 달라 붙은, 공기 중에 있던 먼지라고 했다.  종이가 물 속에서 나오자마자 거기 있는줄도 몰랐던 먼지를 보여줬다.

혼자 밥 먹다가 내가 내는 소리가 아닌 소리가 들려 둘러보니 식탁에 꽂아둔 백합에서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떨어지는 꽃잎은 시들고 말라서 꽃대에 달려있는 잎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다음이었는데도 떨어질 때 그런 소리를 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중 둘 다 말을 멈추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던 순간 “소녀여”라는 노랫말이 들렸다.  조동익과 이병우의 ‘어떤날’ 2집에 실린 곡이라고 한다.

나의 첫먼지, 첫꽃잎떨어지는소리, 첫소녀여.  최근 머릿속으로 많이 반복한 순간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순간들이 내게 각인된 이유는 단지 감각기관이 처음 지각한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당시 주로 하던 생각이나 내가 처한 상황, 그때 분위기에 대한 개인적인 연결 고리를 건드리는 강한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잊고 싶지 않아서 적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 의도치 않게 잊어갈 때쯤 또다른 첫경험을 거듭하며 살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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