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까만색 텍스트와 손글씨는 모두 이 책↘에서 발췌. 책에 수록된 29편의 에세이 중 조지 오웰 자신의 작가론에 대해 쓴 두 편의 에세이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1946/01)」,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1946/여름)」에서 발췌했다. 전문이 아니다. 연두색 글자, bold, underline은 내가 임의로~

「The Prevention of Literature」. 1946년 1월 ;지에 게재. 1946년은 오웰의 문학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할 해였다. 본 에세이집 29편 가운데 9편이 1946년 한 해에 발표된 것일 만큼 좋은 글을 많이 썼다. 죽은 아내의 공백이 컸던 탓이기도 하고, 『동물농장』이 미국에서도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가가 된 이후 최초로 안정된 생활을 누린 덕분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8월부터는 본격적으로 『1984』 집필에 몰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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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 Write」. 1946년 여름 ‘떠돌이’란 뜻의 ;지에 게재. 본서의 제목이기도 한 이 에세이는 조지 오웰의 작가론(문학론)과 정치론이 한데 잘 녹아 있는 가장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일종의 짧은 자서전인 이 글에서, 그는 글쓰기의 네 가지 동기를 밝히고 있다.

(손글씨에 이어)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고 싶은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문장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하며, 충실성의 문제가 새롭게 개입된다. 보다 투박한 유형의 어려움이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이 책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 따위가 가득한 긴 장이 있다. 이와 같은 장은 1~2년 뒤면 일반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말하자면 책을 망칠 게 뻔한 부분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평론가는 그 부분에 대해 내게 훈계를 했다. “그런 걸 뭐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제기된다. 표현의 문제는 더 미묘한 것이라 거론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이다. 일단 내가 근년에는 기발하게 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왔다는 점만 밝히기로 하자. 아무튼 내가 보기엔 어떤 스타일을 완성하고 나면 언제나 그 스타일을 벗어나게 되는 것 같다. 『동물농장』은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십분 자각하면서)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 나는 7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만간 또 하나의 소설을 쓰고 싶다. 그것은 실패작이 될 게 뻔하고, 사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다. 단,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쓰고 싶어 하는지 꽤 분명히 알고 있다.

마지막 한두 페이지를 돌이켜보니 내가 글을 쓰는 동기가 오로지 공공의식의 발현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듯하다. 나는 그것이 마지막 인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이 두 편 외에도 「교수형A Hanging(1931/08)」,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1936/가을)」, 「”물속의 달The Moon under Water”(1946/02)」,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How the Poor Die(1046/11)」,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Lear, Tolstoy and the Fool(1947/03)」가 특히 좋았다. 책에는 오웰이 에세이를 쓴 순서대로 실려있다.

위의 두 에세이를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하나씩 다시 읽으면 오웰이 털어놓은 네 가지 동기 중 어느 쪽을 다부지게 택했는지 확연히 드러나는 에세이도 있고 정치적인 글쓰기와 산문 예술 및 묘사에 대한 애착이 대립하여 빚는 갈등이 두드러진 에세이도 보인다.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1946/여름)」에서 목적의식과 표현 사이에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놓았는데 각각의 에세이는 그 어려움을 오웰이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1~4가지 동기를 어떤 비율로 섞어 한 편의 글로 완성했는지 발견하는 감동을 준다.

이 한 권을 참 오래도 읽었다. 나는 스페인 내전, 까딸루냐 이야기, 독립노동당 등 30년대 말~40년대 초에 걸쳐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세계사의 ‘핫’했던 역사를 다룬 에세이가 참 힘들었다…. 각주를 달아주신 옮긴이 이한중 님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 각주의 내용마저 내겐 어려웠다. 모르는 단어를 영영사전에서 찾았더니 설명이 더 모르는 단어로만 써있을 때 같은 느낌이 종종 들었는데 일반적인 수준의 세계사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처럼 어려워하지 않고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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