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밀란 쿤데라 전집 14 / 한용택 옮김 / 민음사

1부 화가의 난폭한 몸짓 _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해서

1

어느 날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화와 자화상에 대한 책을 출간하려는 미셸 아르솅보가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에세이를 한 편 써 달라고 내게 제안한다.  나는 그 일이 화가 자신이 원했던 것임을 내게 단언한다.  그는 예전에 《라르크》에 실렸던 내 짧은 글을 상기시키는데, 베이컨이 스스로를 발견한 드문 책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던 글이라고 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토록 찬미했던 예술가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받은 이 메시지 앞에서의 감동을 나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중에 『웃음과 망각의 책』의 일부에 영향을 미친) 《라르크》의 그 글은 헨리에터 모레스의 초상화 삼부작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 글을 이주 초기인 1977년 즈음에, 그때 막 떠나왔지만 심문과 감시의 땅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나라에 대한 추억에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썼다.  지금 나는 베이컨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예전의 같은 텍스트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2

“1972년이었다.  우리가 빌린 프라하 교외의 한 아파트에서 나는 어떤 젊은 여자를 만났다.  이틀 전 그녀는 경찰로부터 나에 대해 하루 종일 심문을 받았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이야기해주기 위해 비밀리에 (그녀는 늘 있는 미행을 두려워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심문에 대비해서 내 대답과 그녀의 대답이 같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세상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아가씨였다.  심문이 그녀의 심신을 불안정하게 했고, 두려움은 사흘 전부터 그녀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안색이 무척 창백했으며,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화장실에 가기 위해 끊임없이 방을 나가곤 했다.  덕분에 우리의 만남 내내 저수조를 채우던 물소리가 함께했다.

나는 그녀를 오래전부터 알았다.  그녀는 지성적이었고, 기지가 가득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조절할 줄 알았고, 언제나 완전무결하게 옷을 입었기에 그녀의 치마는 그녀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한 치의 나신(裸身)도 짐작하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큰 칼과도 같은 두려움이 그녀를 단번에 풀어 젖힌 것이다.  그녀는 정육점 고리에 매달린 어린 암소의 잘린 몸뚱이처럼 헤벌어진 채 내 앞에 있었다.

화장실 저수조를 채우는 물소리가 거의 그치지 않는 와중에, 나는 돌연 그녀를 강간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다.  그녀를 강간하고 싶은 욕망이지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애정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내 손을 난폭하게 대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인 그녀의 모든 모순과 함께 순식간에 그녀의 전부를 취하고 싶었다.  완전무결한 그녀의 치마와 반항하는 그녀의 창자, 그녀의 이성과 그녀의 두려움, 그녀의 자부심과 그녀의 불행을 모두 같이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모든 모순이 그녀의 본질을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보물, 금괴,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진 다이아몬드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그녀를 그녀의 창자 속 똥 그리고 형언할 수 없이 고귀한 그녀의 영혼과 함께 단 한순간에 빼앗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불안으로 가득 찬 그 두 눈(합리적인 얼굴의 불안에 떠는 두 눈)을 보고 있었으며, 그 눈이 불안에 떨면 떨수록 내 욕망은 더욱 더 터무니없어지고, 더 바보 같아지고, 더 파렴치해지고, 더 이해할 수 없어지고, 더 실현 불가능해졌다.

부적절하고 용납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욕망은 여전히 현실적이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삼부작 초상화를 바라볼 때는 마치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화가의 시선은 난폭한 손처럼 얼굴에 놓여 있었고, 얼굴의 정수를,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진 그 다이아몬드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물론 내면 깊은 곳이 정말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난폭한 몸짓, 타인의 내면과 배후에 숨겨진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타인의 얼굴을 마구 구기는 이런 손의 움직임이 있다.”

3

베이컨의 작품에 대한 최고의 논평은 두 번의 대담을 한 베이컨 자신이다.  한 번은 1976년 실베스터와의 대담이고, 다른 한 번은 1992년 아르솅보와의 대담이다.  두 번의 대담에서 그는 경탄하며 피카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특히 1926년부터 1932년까지에 대해서였고, 이 시기는 그가 진정으로 피카소와 가깝다고 느낀 시기이기도 하다.  그가 ‘아직까지 탐색되지 않은 영역, 유기적인 형식인간 모습과 관계되지만 그 모습을 완전히 비틀어 버리는‘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새로운 영역이 열리는 것을 보는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피카소 작품 대부분에서 인체 모티프들을 유사함에 구애받지 않는 2차원적인 형태로 변형하는 것은 화가의 가벼운 몸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에게 있어서는 피카소의 유희적 행복감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느끼는 놀라움으로 (아니면 공포로) 대체된다.  이 공포에 사로잡힌 화가의 손은 (오래전에 내가 쓴 글의 표현을 빌자면) ‘내면과 배후에 숨겨진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난폭한 몸짓’으로 육체에, 얼굴에 가닿는다.

도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  그의 ‘자아’인가?  물론 초상화는 일단 그려지면 모두 모델의 ‘자아’를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베이컨은 도처에서 ‘자아’가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던 시대에 산다.  아닌 게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경험을 통해서 (특히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지나치게 길 때) 우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비참하게도 다 비슷해서 (눈사태처럼 몰상식한 인구 증가가 이러한 느낌을 더욱 증대한다.) 쉽게 혼동되며,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는 아주 하찮은 것에 의해 구분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런 하찮은 것은, 수학적으로 말해, 종종 균형의 배치에 있어서의 및 밀리미터 차이만으로 대변된다.  여기에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 덧붙는데, 인간은 서로를 모방하면서 행동하며, 인간의 태도는 통계적으로 측정될 수 있어서 여론 조작이 가능하고, 그에 따라 인간은 하나의 개인(주체)이라기보다는 대중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깊은 곳 어딘가에 숨겨진 ‘자아’를 찾기 위해 화가의 손이 강간이라도 하듯 ‘난폭한 몸짓’으로 모델들의 얼굴에 가닿는 것은 바로 이런 회의의 시대에서다.  베이컨의 탐구 안에서 형태들은 ‘완벽한 왜곡’의 지배를 받지만, 결코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성격을 잃지 않으며, 그 형태들이 육체적으로 실재한다는 생각을, 그것들이 살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여전히 삼차원적인 외양을 간직한다.  더구나 그 형태들은 모델과 닮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모델을 의식적으로 왜곡한 초상화가 어떻게 모델과 닮을 수 있을까?  초상이 그려진 인물들의 사진이 이것을 증명한다.  그것들은 서로 닮았다.  같은 인물의 초상화를 구성하는 세 변이가 나란히 놓인 삼부작을 자세히 보자.  이 변이들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그것들 모두에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숨겨진 다이아몬드, 보물, 금괴’, 바로 얼굴의 ‘자아’인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었다.  베이컨의 초상화는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다.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한 개인은 여전히 그 자신으로 남아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사랑하는 존재는 여전히 사랑하는 존재로 남아 있을까?  소중한 얼굴이 질병 때문에, 광기 때문에, 증오 때문에, 죽음 때문에 멀어질 때, 얼마나 오랫동안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자아’가 더 이상 ‘자아’이기를 멈추는 경계는 어디인가?

5

현대 예술과 관련된 나의 상상 갤러리 안에서 베이컨과 베케트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짝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아르솅보의 대담을 읽는다.  “베케트와 나의 연관성에 대해 나는 늘 놀랐습니다.”라고 베이컨이 말한다.  조금 더 밑에는 “……나는 베케트와 조이스가 말하려고 애쓰던 것을 셰익스피어가 훨씬 더 잘 그리고 훨씬 더 정확하고 더 강력한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자신의 예술에 관한 베케트의 사상이 결국 그의 작품을 죽이고 만 것이 아닌가 자문해 봅니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체계적인 동시에 지나치게 이성적인 무엇인가가 있는데, 나를 늘 불편하게 하는 게 아마 그것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회화에서는 언제나 관습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많이 남기고 결코 충분히 제거하지 않지만, 베케트의 작품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제거하려고 한 나머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인상, 그리고 이 아무것도 남지 않음이 공허한 울림을 일으킨다는 인상을 자주 받습니다.”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그 점이 예술가의 판단이 흥미로운 이유다.  베케트에 대해 말하면서 베이컨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는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상투성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보호하길 원한다고 말한다.

그다음에는,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 그리고 전적으로 독자적인 기준을 지닌 현대 예술이 예술의 역사에서 마치 고립된 시기를 표상하기라도 하듯, 전통과 현대 예술 사이에 장벽을 친 모더니즘 교조주의자들에게 저항한다고 말한다.  결국 베이컨은 예술의 역사를 총체성 속에서 내세운다.  20세기라고 해서 우리가 셰익스피어에게 진 빚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예술이 지극히 단순화된 하나의 메시지로 변형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예술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지나치게 체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을 삼간다.  그는 작품이 그것을 보는 (또는 읽거나 듣는) 사람과, 미디어를 통하지 않은 그리고 선입견이 개입되지 않은 직접적인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란하고 불투명하며 이론을 내세우는 다변증(多辯症)에 의해 최근 반세기의 예술이 오염되면 될수록 더욱 더 위험이 커진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곳에서 베이컨은 자취를 지워, 자기 작품의 의미를 하나의 비관주의-상투성으로 단순화하려는 전문가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서 ‘공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꺼린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한다. (뜻밖에 떨어진 물감 얼룩이 단번에 그림의 주제를 바꾸듯, 작업 중에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우연이다.)  모든 사람이 그의 그림을 보고 엄숙함에 환호할 때, 그는 ‘놀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실망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는 곧 이렇게 명시한다.  그의 경우에 그것은 ‘유쾌한 실망’이라고.

6

베케트의 관한 성찰에서 베이컨은 “회화에서는 언제나 관습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많이 남기고 결코 충분히 제거하지 않지만…….”이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많은 관습적인 것들, 이것은 화가의 발견이 아니고, 참신한 기여가 아니며, 독창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산( 遺産), 관례, 채우기, 기술적 필요에 의해 유지되는 구상과 관련된 모든 것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대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소나타 형식에서 (매우 의례적이기 일쑤인) 하나의 테마로부터 다른 테마로의 전이다.  거의 모든 현대 예술가는 이러한 ‘채우기’를 없애려 한다.  관습으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것, 본질적인 것에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을 없애려 한다.(본질적인 것은 예술가 그 자신이며, 오직 예술가만이 말할 수 있다.)

베이컨도 마찬가지다.  그의 그림 배경은 단일 색조로, 극도로 단순하다.  그렇지만 전경(前景)의 몸들은 조밀한 형태와 색을 사용하여, 그만큼 풍부하게 처리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러한 (셰익스피어 식) 풍부함이다.  (단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이 풍부함이 없었다면 아름다움은 마치 다이어트를 하거나 쇠약해진 것처럼 금욕주의적 아름다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컨에게 있어서 언제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 또는 이 아름다움의 폭발이다.  비록 이 단어가 오늘날 그 가치가 손상되고 유행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베이컨을 셰익스피어와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고집스럽게 적용하는 ‘공포’라는 단어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이유다.  톨스토이는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와 그의 암울한 소설들에 대해서 “그는 나를 두렵게 만들기를 원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너무 많은 작품들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를 원하지만 우리를 지루하게 할 뿐이다.  두려움은 미학적인 감정이 아니며, 톨스토이의 소설들에서 보이는 공포는 결코 우리를 두렵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안드레이 볼콘스키를 마취 없이 수술하는 애절한 장면에 아름다움이 결핍된 것이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그 어떤 장면에도 아름다움이 결핍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베이컨의 그 어떤 그림에도 아름다움이 결핍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푸주한의 가게들은 끔찍하다.  하지만 베이컨이 그에 대해 말할 때 그는 “화가에게 있어서 그곳에는 고기의 색이라는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다.”라는 점을 잊지 않고 알아차리게 한다.

7

베이컨 자신이 유보적인데도 내가 끊임없이 그를 베케트와 가깝다고 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 모두 그들이 속한 각각의 예술 역사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다.  말하자면 그들 각자는 극예술의 맨 마지막 시기와 미술사의 맨 마지막 시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이컨은 오일과 붓을 언어로 사용하는 마지막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베케트는 작가의 텍스트가 기본이 되는 극작품을 여전히 쓴다.  베케트 이후에도 연극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또 진화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진화에 영감을 주고 혁신하며 그 진화를 보장하는 것은 더 이상 극작가의 텍스트가 아니다.

현대 예술사에서 베이컨과 베케트는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길을 닫는다.  어떤 현대 예술가가 중요하느냐고 묻는 아르솅보에게 베이컨은 “피카소 이후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로열 아카데미에서 팝아트 전시회가 열리는데 (……) 그렇게 모인 그림들을 모두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제 생각에는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비었어요, 완전히 비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워홀은?  “……저에게 그는 중요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면 추상 예술은?  물론 아니다, 베이컨은 추상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카소 이후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마치 고아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고아다.  자신의 인생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의미에서조차 그는 고아다.  길을 열던 사람들은 동료, 해설자, 숭배자, 지지자, 동행자 등의 무리 전체에 둘러싸였다.  그는 혼자다.  베케트가 혼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실베스터와의 대담에서 그가 말한다.  “같이 작업하는 여러 예술가들 중 한 명이 된다면 더 신이 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유쾌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같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더니즘, 문을 닫는 그들의 모더니즘은 그들을 둘러싼 모더니티에 더 이상 부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둘러싼 것은 예술의 마케팅이 촉발한 유행의 모더니티다.  (실베스터: “추상화가 더 이상 형태의 배열이 아니라면, 추상화를 대할 때 구상화를 대할 때와 동일한 본능적 반응을 보이는 나 같은 사람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베이컨: “유행이죠.”)  위대한 모더니즘이 문을 닫는 시대에 모던하다는 것은 피카소의 시대에 모던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베이컨은 고립되었다.  (“같이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과거 쪽에서도 미래 쪽에서도 고립된 것이다.

8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베케트도 세상의 미래나 예술의 미래에 대해서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이 환상의 종말 순간에, 그들에게서는 엄청나게 흥미롭고 의미 있는 동일한 반응이 보인다.  전쟁, 혁명과 실패, 대학살, 민주주의의 사기, 이런 주제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일체 보이지 않는다.  이오네스코는 「코뿔소」에서 여전히 거대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베케트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  피카소는 여전히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다.  베이컨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주제다.  (베케트와 베이컨이 사는 것과 같은, 또는 산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한 문명의 종말을 살아갈 때에, 최후의 난폭한 대면은 사회나 국가 또는 정치와의 대면이 아니라 인간의 생리적인 물질성과의 대면이다.  예전에는 일체의 윤리와 종교, 나아가서는 일체의 서양 역사를 응축했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거대한 주제조차도 베이컨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생리적인 스캔들로 변형되는 이유다.  “나는 도살장과 고기와 관련된 이미지들에 늘 감동을 받았고, 내게 있어서 그 이미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살하기 위해서 밖으로 끌려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촬영된 동물들의 놀라운 사진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냄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동물들의 공포를 연관시키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베이컨은 무신론자이고, 신성모독의 개념은 그의 사고방식 안에 설 자리가 없다.  베이컨에 따르면 “이제 인간은 자신이 우발적 존재이고 의미 없는 존재이며 아무 이유 없이 끝까지 유희를 즐겨야 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예수는 아무 이유 없이 끝까지 유희를 즐긴 우발적 존재다.  십자가는 아무 이유 없이 끝까지 즐긴 유희의 종말이다.

그렇다, 신성모독은 없다.  오히려 본질적인 것을 향해 침투하려고 애쓰는 명철하고 슬프며 사색에 잠긴 하나의 시선이 있다.  모든 사회적 꿈이 증발해 버리고 인간이 “자신을 위한 종교적 가능성이 완전히 무효화되는” 것을 목격하는 이 시기에 어떤 본질적인 것이 드러날 수 있을까?  몸이다.  몸은 명백하고 비장하고 구체적인 유일한 에케 호모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깃덩어리고, 우리는 잠재적인 해골인 것이 분명하다.  정육점에 갈 때면, 나는 내가 동물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늘 놀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관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며, 단순한 명백함이다.  하지만 그 명백함은 우리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베일에 가려 있는데, 그 집단은 자신의 꿈, 선동, 계획, 환상, 투쟁, 동기, 종교, 이데올로기, 열정 등으로 우리 눈을 멀게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베일이 걷힐 것이고, 우리는 몸과 단둘이 남겨지고, 몸이 우리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마치 심문에 쇼크를 받은 뒤 삼 분마다 화장실로 사라지던 프라하의 아가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두려움, 자기 내장의 격통 그리고 저수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환원되었었다.  마치 베이컨의 1976년 작 「변기 옆의 인물」이나 1973년 작 「삼부작」을 보면서 내가 물소리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프라하의 아가씨가 대항해야 했던 것은 더 이상 경찰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복부였고, 만약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 공포의 장면을 주재했다면, 그것은 경찰관이나 공산당 간부 또는 사형집행인이 아니라, 신(神), 반-신(反-神), 그노시스설(說) 신봉자들의 못된 신, 조물주, 창조주 등,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대충 붙여 만든 몸의 우연성으로 우리를 영원한 함정에 빠트린 자이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당분간 그 몸의 영혼이 될 수밖에 없다.

베이컨은 이 창조자의 아틀리에를 자주 염탐했다.  예를 들어 「인체 연구」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 그림들에서 인간 몸의 정체가 단순한 ‘우연성’임을, 예컨대 손이 세 개이거나 무릎에 눈이 달리거나 하는 것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었던 우연성임을 밝힌다.  그의 그림들에서 나를 공포로 채우는 유일한 것들이다.  그런데 ‘공포’는 적절한 단어일까?  아니다.  이 그림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에 적절한 단어는 없다.  이것들이 불러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공포, 그러니까 역사의 광기, 고문, 박해, 전쟁, 대학살, 고통, 이런 것들에 의한 공포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베이컨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공포다.  그 공포는 화가에 의해 급작스럽게 베일이 벗겨진 인간 몸의 우발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9

거기까지 내려가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얼굴이다.

얼굴은 무한히 연약하며 몸 안에서 전율하는 ‘자아’, 즉 ‘이 숨겨진 다이아몬드, 이 보물, 이 금괴’를 은닉하고 있다.

얼굴, 나는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인생이라는, ‘의미가 결핍된 이 우연성’의 삶을 살기 위한 이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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