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게도 아는 게 없으니 현대 그림책 작가 ‘이름’에 대한 기대나 출판사에 대한 고정 관념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것을 집는다.  돌잔치에서 물건 집듯 집은 책이 Hervé Tullet의 책이었다.  검색하다가 동영상과 함께 이 책을 소개흥미로운 사이트도 하나 발견했다.

“You can read it as you want.” (…) “I hope everybody could play with a book.”

   

   

이 두 권을 꽤 오래 뒤적이며 가지고 놀 만큼 다 놀고나서 집에 왔다.  책을 보는 동안 ‘이렇게 만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지?’라는 의문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도 며칠이 지나서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탄탄한 서사를 갖춘 그림책보다 이런 장난감에 가까운 것들인가?

1학기 때 있었던 종이 오려 하는 드로잉 시간에, 내가 한 건 너무나 구상성이 떨어져서 해석의 여지가 많은 것이 무책임한 작업이 될 수 있다는 크리틱을 들었다.  어떤 모양을 놓고 누구는 사람이라 하고 누구는 나무라 할 때 내가 그걸 가지고 ‘난 사람을 그렸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걸 사람으로 봐야 해”라고 우기는 건 참 구차하다.  책임 소재를 묻기도 전에 일단 구차해.  그 이후 3인 프로젝트에서 선생님이 ‘쓰레기를 모아 붙여 놓았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일차적으로는 쓰레기를 모아 붙여 놓은 것으로 볼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작업을 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우겼던 것 같다.

그런데 Hervé Tullet 책은 나무처럼 그려놓고 사람으로 받아들이길 강요하지 않는다.  무엇을 그린 것처럼 보이는지도 상관 없어 보인다.  책장을 넘기며 겹쳐지는 구멍들이 만드는 새로운 모양을 관찰하거나 여러가지 색깔이 여러 경계에서 만나게 만드는 ‘과정’이 ‘시간’과 함께 존재한다.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독자 맘이며 그 자유로 인해 굉장히 개인적인 독서가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기행문을 볼 땐 일단 글과 그림을 따로 본다.  이런 책에 대한 분석은 literature를 논할 때 도입하는 몇 가지 정형화된 관점(character, point of view, plot/structure, setting, theme, symbolism/allegory, etc.)과는 확실히 다른 도메인을 필요로 한다.  재미있네.

피츠제럴드보다 로브그리예가 좋다.  모리스 샌닥보다 에른스트 얀들이 좋다.  요런 나의 기준으론 윌리엄 스타이그와 에드워드 고리가 같이 묶이기도.  (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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