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교사 아카데미 초청 특강 제2강 홍세화 님 강연에서 나누어주신 발제문을 여기 공유합니다(펼쳐보세요).  누구나 들을 수 있었던 강연에서 직접 나누어주신 유인물이지만 혹여 공유에 문제가 있다면 내리겠어요.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을 만든 한국 학교교육

지적인종주의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피부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두뇌를 선택할 수 없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이 담고 있는 물음은 사람의 두뇌의 용량과 기능은 서로 다른데 오로지 문제풀이와 암기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종주의와 무슨 큰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로지 경쟁만 중시하는 한국에선 어린 학생들에게 등급과 석차를 매기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직 미성년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너는 1등이다”, “너는 35명 중에 35등이다”라고 등수를 매긴다.  일상에 묻혀 이미 익숙해진 일이 되었지만 반인권적 폭력이다.  유럽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모두 지적 인종주의자들이고 이에 대해 문제의식조차 없는 철저한 지적 인종주의자들인 것이다.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은 스스로 우쭐대면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업신여길 수 있고, 성적이 낮은 학생은 어린 가슴에 상처를 입는다.  실제로는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보기 전에 잊어버린 학생의 차이”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 학교와 교실은 이미 차별과 억압을 ‘익히는(習)’ 곳이 돼버렸다.  유럽과 다른 점 중의 하나인 게 분명하다.

선택과 집중

우리 청소년 학생들은 공부를 참 많이 한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공부만 한다.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자연도 벗하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그저 공부만 한다.  그래서 공부 시간만 따지면 세계 으뜸이다.  그러나 책은 읽지 않는다.  공부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소설책이든 교양서든 책을 읽을라치면 “공부 안 하고 뭐 하냐?”라는 지청구를 들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책은 안 읽거나 못 읽는 것, 이게 우리 학생들의 일상이다.  이 점이 유럽과 다른 점이다.  유럽의 청소년 학생들은 공부에 치어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를 볼 수 있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눈을 뜨는 것은 공부시간이 제일 많은 한국의 학생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내는 유럽의 학생들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가령 한국의 한 학생이 어느 과목 시험에서 88/100점을 받았다고 하자.  학부모의 반응은 어떨까?  “88점 받았으니 잘 했구나”일까?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조건반사적으로 이런 물음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그게 몇 등이냐?”

왜 우리는 만점이 100점일까?  프랑스처럼 20점이나 핀란드처럼 10점이 아니고?  점수 폭이 넓어야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학생들은 가령 12/20점 이상을 받으면 그 시험 영역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한다.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고,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에게 석차나 등급을 주지 않고 합격/불합격 기준으로 절대평가만 하기 때문이다.  10/20이 합격/불합격을 가르는 점수이므로 12/20 이상의 점수를 받은 학생은 그 시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연애하고 여행하고 자연과 벗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 적성을 발견할 수 있고 적성에 맞아 흥미를 느끼는 교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88점이 아니라 99점, 심지어 100점을 받아도 그 시험 영역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한 등수라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1등을 하고 1등을 끝까지 지킬 때까지.  모든 학생이 모든 과목의 모든 시험 영역에서 끝까지 해방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선행학습과 반복학습을 끝없이 반복하는 우리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며 공부하기를 기대한다면 공부에 환장한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너나 할 것 없이 공부에 지치고 공부가 지겹다.  자발성, 능동성을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자기 적성을 찾을 수도 없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모든 과목에서 일등을 해야 하므로 자기 적성과 관련된 과목에 집중할 수도 없다.  ‘선택과 집중’이 불가능한 것이다.

유럽의 학생들이 책과 토론과 여행으로 사회와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 때 우리 학생들은 오로지 시험 문제지만 만난다.  상상력이나 창조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과 사회와 만나지 않은 채 오로지 시험 문제지와 만나려고 공부하고 또 공부할 뿐인데?

인문사회과학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명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료하다.  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한다.  사람에 관한 학문, 곧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곧 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내가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사회 안에서 주체적 자아로 살기 위해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주체적 자아를 지향하는 나에게 요구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 뜨기”를 위한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에는 원래 정답이 없다.  정밀과학인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다른 점이다.  가령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폐지되어야 한다”도 정답이 아니고 “아니다,  존치되어야 한다”도 정답이 아니다.  다만 각자의 견해가 있을 뿐이고, 그 견해가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거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국어, 사회, 경제, 역사, 지리, 윤리, 도덕, 철학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공부에 암기가 아닌 다양한 독서와 토론이 받쳐주어야 하는 이유다.

이처럼 인문사회과학은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는, 정답이 없는 학문인데 우리의 서열화된 대학은 초중고 교육은 대학입시교육으로 종속시킴과 동시에 학생들은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도록 요구했다.  인문사회과학을 생각과 논리가 없고 정답이 있는 ‘반(反)학문’으로 왜곡시킨 배경이다.  학생들에게 생각과 논리를 물어서는 일등부터 꼴찌까지 정확하게 줄을 세울 수 없기 떄문에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 사물과 현상에 관해 묻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도록 요구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에 관해 암기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생각과 논리의 학문이 암기과목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가령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대신에 이런 따위의 질문만 받는다.

“다음 나라들 중에서 실질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는?  1) 미국  2) 중국  3) 일본  4) 러시아  5)한국”

반학문

위에 말한 사형제도는 하나의 예로 들었을 뿐이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물음에는 끝이 없고, 그래서 우리는 국어, 역사, 지리, 사회, 경제, 윤리, 철학 등 다양한 교과목과 만난다.  하지만 우리는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할까?  연대를 암기한다.  우리는 국어 시간에 시를 읽고 시적 감수성을 표현하도록 요구받을까?  시를 외우고 시인의 이름과 시인이 무슨 파에 속하는지 암기한다.  우리는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노동의 가치에 관해 생각하도록 요구받는가?  기껐해야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노동3권이 무엇인지 암기한다.

프랑스에서 역사 교수와 잠시 만난 적이 있다.  그 교수는 내게 중고교 시절 역사 점수를 어떻게 받았느냐고 물었다.  내가 85/100점도 받았고 92/100점도 받았다고 대답하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한국의 역사교수들은 대단하구나.  어떻게 당신의 역사를 보는 안목을 그렇게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랍다”라고.  이것은 경탄이 아니라 일종의 조롱이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게 아니다.  연대 등을 암기하는 것으로 역사를 공부하는 양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성 소수자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해볼 것을 요구받는가?  그런 건 하지 않는다.  성 소수자에 관한 생각을 펴는 것으로는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울 수 없기 떄문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사회 교실에서 “노동조합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내 생각을 써보라는 요구를 받는가?  그런 건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유리온 숍’에 관해 암기만 한다.  그뿐이고 유리온 숍이 앞으로 노동자로 살 내 삶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토론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모든 권력은 폭력을 동반하는가?”, “예술가는 예술의 이름으로 실정법을 어길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에 내 생각을 펴기를 요구받는가?  아니다.  생각과 논리를 요구해서는 일등부터 꼴찌까지 정확히 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의 교실에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인간과 사회에 관해 더욱 정교하고 풍요로운 생각과 논리를 갖도록 글쓰기와 토론이 이루어질 때, 한국의 교실에서는 학년이 올라가도 계속 객관적 사실을 암기하고 있는지만 묻는다.  간단하고 쉬운 질문에서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앞에서 예로 든 “따음 나라들 중에서 사형제도가 실질적으로 폐지된 나라는?”라는 질문은 우리나라에서 꽤 높은 수준의 5지선다 문제다.

한국에서 남다른 교육자본을 형성하여 사회 상층을 차지한 사람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뜨기에 있어서 올바른 생각, 풍요로우면서도 정교한 생각을 검증받은 게 아니다.  오리지 암기와 문제풀이를 잘해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관해 질무을 던질 줄 모르고 오직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암기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그들이 기존체제를 지키는 가치관과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젊은이들 대부분은 물질적 이해관계에서는 영악하지만, 인간과 사회,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는 거의 무뇌아 수준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인데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을 뜨는 데에는 부적합한 DNA를 타고 났는가?  그럴 리 없다.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라는, 서열화된 대학의 요구에 따라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면 그 무엇 때문이겠는가.  학생 줄 세우기 관행의 포로가 된 교사들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단답형이나 오지선다 문제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에 교사들의 편의주의 탓도 있다면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가령 유럽의 학생들과 한국의 학생들에게 각각 하얀 종이를 나누어주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비교해 보자.  유럽의 학생들은 그 종이 위에 글쓰기를 할 때 한국 학생들은 같은 용어나 단어를 거듭 반복하여 쓴다.  유럽의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정리하여 기술할 때 한국 학생들은 암기하려고 반복하여 쓰는 것이다.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생각의 주체성을 갖도록 하는 교육인가, 아니면 지배세력이 요구하는 내용을 암기하는 교육인가의 차이가 글쓰기 교육의 유무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의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이전에 독서와 글쓰기가 사라진 중고등학교의 ‘미친 교육’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만큼 자아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게 해야 한다.  우리는 또 인문사회과학을 암기 과목으로 바꾼 탓에 학생들에게 흥미를 갖지 못하게 한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학생들은 사물과 현상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펼 때 공부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서열

우리 교육의 일상은 집단광란 상태에 빠진 지 오래다.  집단의 일상이 돼버렸기 때문에 광란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교육의 세 주체가 모두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들이 학습노동에 시달리고 학부모들이 사교육비 부담으로 고통 받고, 교사들은 비민주적인 학교에서 일상적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동시대를 사는 기성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 광란 상태를 감내할 것인가.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조기교육과 입시교육 때문에 아동과 청소년들의 인구너이 침해되고 있다고 지적해도, 어린아이들이 자유로운 물고기를 부러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수능 몇 점 때문에 청소년들이 허공에 몸을 던져도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 서열체제를 이대로 두어야 하는가.

한국의 학벌체제는 현대판 신분제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가 없는가는 물론이고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한 뒤 4년 동안 등록금을 잘 냈다는 증표로 받는 대학 졸업장은 죽는 순간까지 효력을 발휘한다.  출생 시점이 아닌 만 18세에 서열이 매겨진다는 점에서 과거의 신분제와 다르지만 여기에 의미심장한 함정이 있다.  겉보기엔 경쟁시험에 의해 서열이 매겨진다는 점에서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는 듯한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지난 시절에는 일제가 망하고 분단과 정쟁을 겪으면서 사회상층에 빈 자리가 생긴 데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그런 자리가 많이 늘었다.  서민 출신이 들어갈 틈새가 컸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 자리들이 이미 채워졌으며 ‘고용 없는 성장’ 시대의 저성장이 스스로 말해주듯 사회상층의 자리뿐만 아니라 ‘괜찮은’ 자리도 줄고 있다.  이처럼 병목 현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처들이는 부유층을 서민 출신이 따라잡이 용이 될 가능성은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 정도밖에 없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이미 사회계층의 단순재생산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반인권적 질곡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을 아수라의 질곡에서 구해야 한다.  자연과 벗하고 친구와 벗하면서 마냥 뛰어놀아야 하는 어린 시절을 온통 좁은 공간에 가두고 학습노동을 강요하는 사회가 온전한 사회일 수 없기 때문이다.  등급과 석차 스트레스, 상위권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아이들을 자살로까지 몰아가는 현실을 용인한 채 우리는 인권을 말할 수 없고 상식과 정의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이 침해당하는 교육현장에서 인권의식 형성을 기대할 수 없고, 어린 사회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강요되는 경쟁 속에서 현대의식의 형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의식도 연대의식도 기대할 수 없는 학벌 경쟁은 소수의 경쟁 승리자들이 누리는 부와 지위와 관력을 더욱 강고히 하기 위한 것 이외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  학벌체제가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입시지옥은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한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학벌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그 보상으로 특권의식을 갖는 한편, 패배한 자들은 신분귀족화한 사회상층에 대한 견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과거 신분제에선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한국의 사회상층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이긴 자와 패배한 자 모두 학벌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누리는 지위, 명예, 권력과 부를 당연한 보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위에 사교육비 지출은 투자로 인식된다.  경쟁 승리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투자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여긴다.  엘리트들에게서 사회 환원 의식이나 사회적 책임의식을 찾기 어려운 대신 특권의식과 집단이기주의로 무장한 패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슨 경쟁력? – 국내 권력 경쟁력!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서열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스카이 출신들이 한국사회의 권력, 부, 지위를 독과점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들은 대학서열체제를 없애면 국가경쟁력은 어디서 얻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대학의 경쟁력은 권력의 경쟁력이 아니라 학문의 경쟁력이다.  서울대 교수의 절대 다수가 미국 유학 출신인 점이나, 서울대 대학원 정원을 타 대학 학부생 출신들이 채워주고 있는, 이른바 학벌세탁 현상도 서울대의 국내 경쟁력을 말해준다.  그들은 그 학교에 없는 학문의 경쟁력을 빙자하여 그 학교 출신들이 누리는 권력의 국내경쟁력을 옹호하는 것이다.  더구나 초중고 시절에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암기하고 문제 푸는 것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경쟁력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가 지난 지식기반 사회라는 오늘날 창조성도 없고 상상력도 빈곤한 사회구성원에게서 경쟁력이란 게 가당키나 한가?  그것이 벗과도 자연과도 사귀지 못한 채 좁은 공간에 갇혀 등수와 등급의 노예가 되어 학습노동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진 인성, 닫힌 상상력에 값할 만한 것인가?  조기유학과 국외연수 열풍, 천문학적인 사교육비에 값할 만한 것인가?

학벌체제는 또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평생 교육을 멀리 하게 한다.  만 18세에서 인생의 서열이 거의 정해졌기 때문에 그 이후에 공부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사회 구성원은 대학입시 때 한번, 임용이나 취직할 때 한 번, 일생 동안 딱 두 번 긴장한다.  남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려고 두 번 긴장할 뿐, 자기성숙을 위한 모색과 긴장은 거의 죽은 사회다.  대학 도서관마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생이 아니라 고시생들로 넘쳐나는 것은 서열화된 대학에 따라 규정되는 한국사회에서의 자기 서열을 뛰어넘는 길이 고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시공부를 하거나 토익이나 취직 공부를 할 뿐 인문학적 기초나 사회문화적 소양을 갖추려 하지 않는다.  공자님도 무엇이든 잘하기보다는 좋아하라고 했고 좋아하기보다는 즐기라고 했다.  학문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학습노동으로 지칠 때로 지쳤기 때문에 공부는 이미 즐거움이 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대기만성형의 석학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학생들이 학문을 즐기지 않는 대학에서 학문 경쟁력이 나올 리 없고 학문 경쟁력이 없는 곳에서 국가경쟁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도 국가경쟁력을 빙자하여 학벌체제를 옹호하는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학벌체제 수혜자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그들의 사회인식 능력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나 엘리트층은 형성되게 마련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능력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는가에 있다.  한국의 엘리트층에게 엘리트로서 능력도 부족하고 사회적 책임의식도 없는 것은 온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광란 상태의 교육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대학생들에게서 자기 생각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스카이’ 대학 당국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 대학에서 한국출신 유학생들이 질문을 제기할 줄 모르고 토론도 할 줄 모른다는 얘기도 나보다 자주 들었을 것이다.  그런 결과를 낳은 게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만든 탓임을 부정하기 어려울 터인데, 그렇게 만든 주범이 바로 그들 자신이다.  그들이 이 점을 알지 못한다면 대학의 엘리트로서 능력이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며, 알고 있다면 사회적 책임이 없다고 말할 정도가 아니라 파렴치한 기득권 수혜자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대학평준화라는 말에서 하향평준화를 떠올리는 사람, 대학평준화가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부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한국의 대학서열체제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부디 작은 상상력이라도 발동하기 바란다.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쟁이 거의 마감되는 구조와 평준화된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쟁이 시작되는 구조 중에 어느 쪽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는가?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사회구성원들을 대학 간판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사회구성원들이 공정한 경쟁의 룰 아래 남과의 경쟁만이 아니라 자기와 부단히 싸우면서 성숙의 길을 모색할 때, 그 과정과 결과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될 때 국가 경쟁력을 얻을 수 있고 민도를 높여 문화국가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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