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철민오빠랑 영풍문고에 갔다가 아이들 읽어주려고 집었다.  책 뒷표지에 ‘달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요!’라고 써있다.  이건 좀 내용에서 너무 많이 나갔다.  다르면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는 편견을 오히려 만들 수 있는 말이다.  달라도 사이좋게?

‘다르다’는 말은 대상의 비교에서 오는 판단이다.   ‘다름’에 대한 생각과 그에 따른 선택은 유아기에 끝나지 않는다.  어떨 때는 비교하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비교하고 있다 – 특히 ‘공감’할 때.  좌변과 우변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 따져서 같을 때만 반짝 “앗, 나도!” 하고 등호[=]가 빛나는 순간이 그렇다.  카레를 좋아하는 ‘A’, ‘B’ 두 사람이 카레에 대한 선호도를 이야기할 때 A: 나 카레 좋아해.  B: 나 카레 좋아해.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을거다.  사오정 유머 생각난다(“뭐 먹을래?”  “카레.”  “그래?  그럼 난 카레”).  일상적 대화에서는 A: 나 카레 좋아해.  B: 어머, 나도 좋아해.  >  동의/동감.  >  “우리는 카레를 좋아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카레를 좋아하는 정도가 객관적으로(?) 다를 수 있다(다를 수 밖에). 좋아하는 카레의 종류가 다를 수 있다.  A는 먹을만 한 정도만 되어도 좋다고 하는 반면 B는 한 끼도 카레를 안먹으면 안될 정도로 좋아하는 경우에만 특별히 ‘좋다’고 말한다면?  하지만 “카레를 좋아하니?”라는 질문에 대한  A와 B의 대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대답의 겉이 같다고 속도 같다고 볼 순 없다.  겉이라도 같은 것에 좋아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먼저 겉.  연필은 반찬이 아니다.  이 명제의 진리값은?  ‘참’이다.  그런데 반찬만이 옳다며 반찬에 속하지 않은 연필이(+연필이 필요한 사람들까지) 옳지 않다고 뿌리치면 잃는 게 많다.  연필이 답답해해. 

그 다음, 속.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안 좋아한다고 의아하고, 내가 남에게 하는 일을 남이 나에게 하지 않는다고 화내는 것이 참 피곤한 일이다.  선호와 행동을 꼭 “우리”가 같이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배척의 빌미로 삼는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는 어떤 벼슬도 될 수 없다.

이 책, 1-2학년 꼬마들이 좋아할거야.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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