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반부는 익숙한 동네다.  구경남(김태우)가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엄지원이 맡은 영화제 프로그래머 역할이 꼭 옆 부서 사람처럼 느껴졌다.  경남이 부상용(공형진)을 만나는 TTCinema 입구와 내리막길, 카메라에 같이 담긴 그 더위 모두 오랜만에 만난 ‘귀신’ 마냥 반가웠다.  제천에 있는 한 모텔에서 기술자막팀 친구 두 명과 거진 한 달 넘게 같은 방을 썼는데, 일 마치고 숙소로 걸어와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극장전>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 영화에서 동수(김상경)와 영실(엄지원)이 종로 씨네코아 앞에서 만난다.  그 장면을 보고 참 서울에 오고 싶었는데…  서울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보니까 제천에 가고 싶다.

이 영화에서는 어디서부터가 꿈일까, 꿈 장면의 시작을 기다리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김상경에게 예지원과 추상미가 있었고(생활의 발견), 김승우에게 고현정과 송선미가(해변의 여인), 김영호에게 박은혜와 황수정(밤과 낮)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김태우에게 (정유미+공형진) (고현정+문창길) 커플이 세트로 있다.

“앞으론 약속을 못 지킬거면 하지 마세요.

사람이 왜 그래요?

당신 정말 미친 사람 아니예요?

그 사람 욕할 거 없어요, 당신은.

당신 같은 사람 정말 사절이야!”

“정말입니까?”

공현희(엄지원)가 강간을 당한 상황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화를 낼 수 있었던 타인은 구경남 뿐이었다.  이 씬에서 겉으로 보기엔 현희가 목에 핏줄 세우며 경남을 몰아치지만, 강간을 의도치 않게 방치한 경남에게보다 자신에게 더 화가 나 있다.  경남에게 화를 내는 도중에 갑자기 경남에게서 시선을 떼고 허공을 보며 혼자 자책하는 부분은 꼭 작은 따옴표 속의 말이 실수로 입밖으로 나온 것 같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상황에서 자기가 잘못한 얘기까지 마구 해버리는 것은 전략상 좋지 않은데 그러고 있는 공현희가 귀여워서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이 났다.  실제로 얼굴 보며 핏대 올려 싸워본 적이 없어서 영화나 드라마에 이렇게 격한 장면이 나오면 자세히 보게 된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누군가 경남에게 ‘버럭’ 하는 장면이 이게 다가 아니다.

홍상수 영화가 그리는 여성상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반대로 그런 여성 캐릭터(들)에게 남자 주인공이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주는지, 또 어떻게 휘둘리는지를 보는 쾌감이 더 크다.  가령 이 영화에서는 구경남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구경남이 만나는 여자들이 나온다.  나는 관객으로서 화면 밖에 위치해 경남과 여자를 관찰하는 게 아니라 경남의 눈에 그 여자가 어떻게 보였을지를 전해받는다고 해야하나…  ‘경남에게는 한없이 히스테릭하고 과대망상에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들로 보였나보군’, 이렇게.  내가 홍상수 영화에서 홍상수 감독이 직접 만든 여성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여자는 구경남의 시선으로 관찰해서 받아들인 이후의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의 실재, 전체가 있고 그중 일부가 선택, 과장되어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테니 그렇게 드러난 여성의 더욱 풍부한 원형을 상상해볼 여지가 남아있다.  그런 이미지를 갖도록 허구의 인물인 경남의 시선을 만든 건 감독이니까 홍상수의 시선이나 구경남의 시선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왜곡/과장/단순화된 여성상이 오히려 경남의 캐릭터, 관심사, 가치관 등을 읽을 수도 있는 단서로 작용할 수 있다.

“사람 맘 하나 잡기가 정말 힘들죠.”  평서문과 의문문 중간 정도 되는 말투.  문 앞에서 잠든 자기를 넘어서 지나간거냐고 시비 걸던 ‘해변의 여인’이 목소리도, 말투도,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제목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고순(고현정)의 대사다.

+ 조각가 조씨(하정우)가 호미를 들고 불륜의 현장을 덮쳤을 때 <추격자>의 연쇄살인범 이미지가 겹쳐져서 나도 모르게 흠칫 얼굴을 뒤로 확 뺐다.  그래서 조씨가 억울하다며 전화 붙들고 우는 장면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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