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는 게 아까워서 하나 읽고 쉬고 하나 읽고 쉬고 있는 책.  ‘나의’ 시간과 과거, 지금, 미래, 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얇고 작고 예쁜 양장본으로 올해 새로 나왔다.  예전에 나왔던 판은 모두 절판이나 품절인데 로욜라에 한 권씩 있네.  정말, 다 읽어버리기가 아깝다.  책 소개로 적절할 것 같아 아래에 옮긴이의 글을 옮겨왔다.

옮긴이의 글 – 권루시안

앨런 라이트맨은 과학자인 동시에 문학가이다.  또 사회활동가이기도 하다.  1999년에는 가난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하프스웰 재단Harpswell Foundation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했다.  이 재단은 현재까지 개인의 기부로만 운영되면서, 캄보디아 등지의 학생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고 있다.

이론물리학자로서 그는 극한 온도 · 밀도 조건의 천체물리학 현상에 대해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또 뛰어난 문학가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데, 이 책 《아인슈타인의 꿈》과 또 그가 쓴 소설 《진단The Diagnosis》은 미국 내 수많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고급 문학을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이 책에서 보듯 주로 과학의 인간적 측면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아마도 작가는 괴테와 같은 태도로 과학을 대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과학을 앞에 둔 그의 내적 성찰이 시가 되고 수필이 되고 외적 성찰이 논문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과학과 그 속의 인간을 이처럼 에술적으로 묘사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꿈》은 그가 처음으로 펴낸 소설이지만, 처음으로 쓰는 소설에서 그는 무척 특이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구성면에서 보면 기본 줄거리를 마치 연극에서처럼 프롤로그 – 인터루드 – 인터루드 – 인터루드 – 에필로그로 잡아 다섯 토막의 이야기로 떠받치고 있고, 그 사이사이로 시간에 대한 서른 편의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곧 이야기는 하나하나를 별도로 보아도 제각기 완전한 이야기가 된다.

서른 편의 이야기는 각기 있을 법한 시간의 유형을 들려주고 있다.  어차피 꿈인데 어떤 것이든 다 가능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쓴 것 같지만 이야기는 저마다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논리적이고 아름답게, 시적이고 또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갖가지 시간에 대해 읽어가노라면 ‘과연’ 하면서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기계시간이라든지 체감시간, 중심지로 다가갈수록 느리게 흐르는 시간, 감각과 같아서 사람마다 빠르기가 다른 시간, 온 세계 산봉우리마다 뚱뚱한 새들이 빼곡히 쭈그리고 앉은 듯이 높다랗게 지은 집, 미래가 없는 세계 등등.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여러 가지 시간 유형 가운데 어떤 것을 체험해 보았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중 어떤 시간에 살고 있을 것이다.  시간의 성질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우리 개개인이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진다.  시간이 질서를 향해 움직이는 세계에서는 아무도 정리정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시간이 인과관계를 반영하지 않는 세게에서는 미래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순간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제각기 어떤 시간을 살아가는가에 따라 삶을 대하는 철학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어가면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시간을 찾아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곰곰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독자와 인연을 맺는 것은 이번에 세 번째다.  1993년 진선출판사에서 펴낸 이후 2001년 예하를 통해 다시 출간됐고, 이제 다산책방을 통해 세 번째로 독자에게 다가가게 됐다.  처음 이 책을 옮겼을 때 나는 철저히 체감시간을 사는 사람이었고, 이 책의 원고 작업을 마무리 지은 때도 아인슈타인이 잠을 설치고 출근하여 비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그 시각이었다.  방 안으로 파고드는 아침 햇살이 컴퓨터의 볼록한 화면에 붙은 먼지에 반사되어 화면 내용이 잘 보이지 않던 기억이 난다.  그 사이에 열 몇 살을 더 먹은 지금, 이 책은 그때 내가 품었던 젊은 설렘과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깊은 눈길이 함께 가슴속으로 다가오는 아름다운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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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배기로 두 편 ↓

1905년 6월 17일

베른은 화요일 아침이다.  마르크트 거리에는 손가락이 굵은 제빵공이 지난번 외상을 갚지 않은 어떤 여자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팔을 내휘두르고 여자는 잠자코 빵을 장바구니에 집어넣는다.  빵집 밖에서는 한 꼬마가 2층 창에서 내던진 공을 쫓아가면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꼬마의 롤러스케이트는 소리를 내면서 돌바닥 길 위를 달려간다.  마르크트 거리 동쪽 끝, 그러니까 크람 거리와 바주치는 자리에는 남녀 한 쌍이 아케이드 그늘 속에 나란히 서 있다.  남자 둘이 겨드랑이에 신문을 끼고 지나간다.  남쪽으로 300미터 지점에는 새 한 마리가 아레 강 위를 한가로이 날고 있다.

세계가 멈춘다.

제빵공은 말을 반쯤 하다가 입이 멈춘다.  꼬마는 길바닥을 지치는 자세 그대로 멈춰 서고 공은 공중에서 정지한다.  아케이드의 남녀 한 쌍은 조각상처럼 된다.  지나가던 두 남자도 조각상이 되고 두 사람의 대화는 돌아가는 음반에서 바늘을 들어 올렸을 때처럼 멈춘다.  새는 날아가다가 마치 강 위에 매달린 무대 장치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몇 백만 분의 1초 뒤에 세계는 다시 움직인다.

제빵공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소리를 지른다.  마찬가지로 꼬마도 공을 쫓아간다.  아케이드의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긴다.  두 남자는 쇠고기 값이 오른 것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새는 날개를 퍼덕이면서 아레 강 위에서 계속 원을 그린다.

몇 분 뒤 세계는 다시 멈춘다.  그러다가 다시 움직인다.  멈춘다.  다시 움직인다.

이곳은 어떤 세계일까?  이 세게에서는 시간이 불연속적이다.  이 세계에서는 시간이 중간중간에 끊어지는 것이다.  시간은 신경섬유가 늘어서 있는 것과 같아서, 멀리서 보면 계속 이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섬유와 섬유 사이에 현미경으로나 보일 정도로 작디작은 틈이 벌어져 있다.  신경 자극은 시간의 한 조각을 따라 흐르다가 갑자기 멈추고 조금 뒤 공백을 지나 다음 섬유에서 계속 흘러간다.

시간의 공백은 하도 작아서, 1초라는 시간을 1천 조각으로 나누고 다시 그 조각을 1천 조각으로 나누어야만 끊어진 자리 한 군데를 찾아낼 수 있다.  시간의 조각과 조각 사이에 있는 틈은 너무 작아서 사실상 느낄 수가 없다.  시간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세게는 옛 세계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구름의 위치나 움직임도 똑같아 보이고 솟아오르는 새나 대화의 흐름이나 생각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조각을 맞추어보면 서로 거의 들어맞지만 완전하게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아주 약간씩 자리가 어긋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베른의 화요일에 20대 후반에 접어든 어떤 청년과 아가씨가 거베른 거리의 가로등불 밑에 서 있다.  둘은 한 달 전에 알게 됐다.  청년은 아가씨를 사무치도록 사랑하지만 전에 사귀던 여자가 말도 없이 떠나가버린 쓰라린 경험이 있어서 그 일로 기가 죽어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처지다.  이번 여자는 믿어도 되는지 쉽게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는 아가씨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진실한 감정을 엿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혹시 눈썹이 조금이라도 움직이지는 않는지, 볼이 알아볼 듯 말 듯 조금이라도 붉어지지는 않는지, 눈빛이 변하지는 않는지, 조그마한 기미까지도 자세히 살핀다.

사실은 아가씨도 청년과 마찬가지로 청년을 사랑하지만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그래서 아가씨는 청년의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미소만 지어 보인다.  둘이 가로등 밑에 서 있을 때에 시간이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인다.  두 사람이 고개를 기울인 각도는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기 전이나 다름없이 정확하게 그대로고, 가슴의 고동소리도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전에 없던 생각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아가씨는 이 새로운 생각을 더듬다가 무의식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미소 가운데로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멍한 기색이 지나간다.  이 머뭇거림은 너무나도 짧아서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지만, 그럼에도 조급한 청년은 이를 알아차리고 어떤 기미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가씨에게 다시 만날 수 없노라고 말한 다음, 조이크하우스 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아파트로 돌아가서, 취리히로 이사를 가 삼촌의 은행에서 일하기로 마음먹는다.  아가씨는 거베른 거리의 가로등 밑에서 천천히 집으로 걸어가면서, 청년이 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까 의아해한다.

1905년 6월 25일                                                                    

일요일 오후.  사람들은 말쑥한 옷차림에 일요일 정찬을 배불리 먹고, 아르 거리를 거닐면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나직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가게는 모두 문이 닫혀 있다.  세 여자가 마르크트 거리를 걸어가다가 멈춰 서서 광고를 읽고, 또 멈춰 서서 가게 창 안을 들여다보고, 말없이 계속 길을 간다.  여관 주인은 계단을 쓸어낸 다음, 앉아서 신문을 읽고, 여관 벽에 기대고 눈을 감는다.  거리가 잠들어 있다.  거리가 잠들어 있고, 어디선가 한 줄기 바이올린 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러온다.         

탁자에 책이 놓여 있는 방 한가운데에서 한 젊은이가 서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그는 바이올린을 사랑한다.  그가 켜는 곡조는 부드럽다.  연주하면서 그는 아래쪽 거리를 내려다본다.  남녀 한 쌍이 바짝 붙어 있다.  그는 깊은 갈색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린다.  그는 너무나도 가만히 서 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만이 유일한 움직임이다.  그의 음악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그는 너무나도 가만히 선 채로, 아래층 방에 있는 아내와 젖먹이 아기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연주를 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그와 똑같은 사람이 방 한가운데에 서서 바이올린을 켠다.  이 사람도 아래쪽 거리를 내려다본다.  남녀 한 쌍이 바짝 붙어 있고, 그는 눈길을 돌리고, 아내와 젖먹이 아기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연주를 하는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서서 바이올린을 켠다.  그리고 네 번째, 다섯 번째도 있고 끝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방에 서서 바이올린을 켠다.  멜로디와 생각이 끝없이 많다.  그리고 이 한 시간은 한 시간이 아니라 여러 시간이다.  시간은 두 거울 사이에 세워 놓은 촛불과 같기 때문이다.  시간은 앞뒤로 반사되면서 수없이 많은 영상과 멜로디와 생각을 자아낸다.  이곳은 같은 것이 수없이 많은 세계다.         

그리고 첫 번째 젊은이는 생각하면서 다른 젊은이를 느낀다.  그는 그들의 음악과 그들의 생각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수천 번 되풀이되는 것을 느끼고 책이 있는 이 방이 수천 번 되풀이되는 것을 느낀다.  그는 그의 생각이 되풀이되는 것을 느낀다.  아내를 떠나야 하나?  그때 대학교 도서관에서 그녀가 책상 건너편에서 그를 쳐다보던 그 순간은 어쩌고?  아내의 짙은 갈색머리는 또 어떻게 하고?  그렇지만 아내가 마음 편하게 해준 적이 있었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 한 시간을 빼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언제 주었나?         

그는 다른 젊은이들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수천 번 되풀이되는 것을 느끼고, 이 방이 수천 번 되풀이되는 것을 느끼고, 그의 생각이 수천 번 되풀이되는 것을 느낀다.  되풀이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그 자신의 것이고, 참 모습이고, 미래의 모습일까?  아내를 떠나야 하나?  그때 대학교 도서관의 그 순간은 어쩌고?  그렇지만 아내가 마음 편하게 해준 적이 있었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 한 시간을 빼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언제 주었나?  생각은 그 자신과 똑 같은 수천 명 젊은이들 사이에서 차례로 반사되고 매번 반사되면서 점점 흐릿해진다.  아내를 떠나야 하나?  아내가 마음 편하게 해준 적이 있었나?  혼자 있을 시간은?  생각은 매번 반사되면서 차차 희미해진다.  아내가 마음 편하게 해준 적이 있었나?  혼자 있을 시간은?  생각은 점차 희미해져서 나중에는 의문이 무엇이었는지,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혼자 있을 시간?  그는 텅 빈 거리를 내다보면서 연주한다.  음악이 두둥실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셀 수도 없이 긴 시간인 그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오직 음악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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