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김혜리, 인터뷰이: 전영혁 

cine21에서 발간한 위의 책에서 전영혁 인터뷰 부분만 발췌했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85년생이라 ‘옳다꾸나, 그래그래’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도 많다. 나는 또 내 세대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면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분의 일생 스펙트럼에서 뿜어져 나올 수밖에 없는 그 ‘권위’에 질투가 난다. PFM 내한 공연 때 직접 봤어도 누군지도 몰랐는데, 당시 들었던 말(“어떻게 전영혁을 모를 수가 있죠?”)이 이제는 좀 이해가 된다.  사실 그땐 속으로 ‘어떻게 전영혁을 알 수가 있죠?’ 였어요…  ;p 

* * * * *

전영혁은 과묵한 DJ다. 인사말조차 변주에 인색하다. 한결같이 “전영혁의 음악세계입니다”로 새벽 2시를 열고, “디스크자키 전영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로 3시를 고한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처럼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그가 날마다 반복하는 오프닝과 끝인사는 성경의 “태초에……”와 “아멘”처럼 들릴 지경이다. 그럼 그 사이는? 오직 강 같은 음악의 은총이 넘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살가운 말 한마디 모르는 디스크자키 전영혁의 이름은, 그의 청취자였거나 청취자인 사람들을 감상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영혁과 얽힌 기억을 질문받은 사람들의 눈은 순해지고 뺨에는 홍조가 오른다. 음악 때문에 불면의 청춘을 보낸 30대, 40대라면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프로스트식으로 말해 그들에게 DJ 전영혁은 “자작나무를 탔던 한때”의 표상이다. 어쩌면 그들의 서랍 구석에 잠들어 있는 낡은 테이프에는 서툰 녹음 솜씨 탓에 카멜이나 클라투의 음악 끝자락에 묻어난 청년 전영혁의 음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 냉정한 체하는 디스크자키(전영혁은 가벼운 느낌의 DJ보다 디스크자키라는 또박또박한 호칭을 선호한다)가 20년간 해온 일으 그러니까, 결국 대화였다. 그에겐 말이 아니라 선곡이 곧 청취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엄숙한 비평 행위였다. 전영혁은 손수 돈과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팔아 ‘<전영혁의 음악세계> 20주년 기념음반’ 1천장을 찍었다. 4장의 CD를 담은 재킷 안쪽에 쓴 글 끝에 전영혁은 ‘새벽의 등대지기’라고 서명했다. 적당한 비유였다. 등대지기와 한번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그 바다를 항해한 이들은 등대의 추억을 공유한다.

전영혁은 김민기, 양희은과 같은 1952년생 용띠다. <월간팝송> 편집장을 거쳐 1986년 KBS 제2FM <25시의 데이트>로 디스크자키 일을 시작했다. 프로그램 간판은 <1시의 데이트> <전영혁의 음악세계>로 바뀌었고, 중도에 시간대 문제로 SBS FM으로 터를 잠시 옮기기도 했지만 전파가 외면한 좋은 음악을 알린다는 원칙엔 미동도 없었다. 공영방송의 관점에서 보나 FM의 본분이라는 관점에서 보나, 귀중한 프로그램이라는 점에는 방송국 안 누구도 이의가 없으나, 나서서 더 많은 귀가 깨어 있는 시간대로 옮기려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현재다. 마니아를 육성한 마니아 전영혁은 근본적으로 수집가가 아니라 나누는 사람이다. 인터뷰가 결정되자 동료 문석 기자는 <월간팝송> 애독자 시절 잡지에 소개된 데이비드 샌본의 초기 음악이 궁금하다는 엽서를 보넀더니, 전영혁이 공테이프에 샌본의 음악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줬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내가 ‘음악적 자선’이라는 표현을 쓰자 디스크자키는 ‘음악적 YMCA’라는 농담으로 받았다. 음악에 의한, 음악을 위한 생활은 그의 몸에도 흔적을 새겼다. 타고난 예민한 청각과 밤새워 음악을 듣는 습관은 그를 만성적인 불면증 환자로 만들었고 그 불면은 알려진 대로 청취자에게로 감염됐다. 약속 시각 2시간 전, 앞당겨 만나면 일찍 끝낼 수 있지 않겠냐는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나는 그가 녹음중인 KBS 스튜디오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조심스러웠던 마음은 음악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녹아버렸다. 전영혁은 천진하고 뜨거웠다. 동시에 내가 아는 누구보다 ‘순수하게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앞당겨진 약속을 가리켜)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싫어하시나 봅니다.

그건 아닌데 제가 갈 때가 되어서 그런가봐요. 요즘 유서도 썼어요. 내용은 별것 없고 땅이 부족하면 화장을 하라는 정도. 장기이식은 제 몸이 약해 도움이 안 될 것 같고요. 20년 방송을 했으니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해요. 건강도 안 좋아졌고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쫓기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죠.

역시 CD로 일일이 음악을 트시네요. 요즘은 파일로 내보내는 시스템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요?

아, 그건 바쁜 연예인 DJ들이 쓰는 거죠. 그 사람들은 또 TV에 나가 게임도 하고 그래야 하니까. 나는 아무리 바빠도 절대 파일로 안 해요. 청취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음악 사이에 멘트만 집어넣고 가버리면 그건 도둑이죠.

한 곡씩 트는 과정을 중요하게 보시는군요. CD도 방송국 자료가 아니라, 개인 소장 음반이죠?

방송국 라이브러리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래서 20년 동안 안 잘린 거죠. (웃음) 음반 구입 예산은 자료실에 책정돼 있는데, 거기에는 제 프로그램에 소용될 만한 음반은 한 장도 없어요. 제가 좋아서 자청한 일이라고 여겨 지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지도 모르죠. 별로 슬프게 생각지는 않아요. 원래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모든 것이 슬픈 나라잖아요.

어디까지 왔나 줄곧 헤어리면서 방송하진 않으셨겠지만 언제부터 20주년이라는 지점을 의식하셨나요?

15주년부터요. 10주년 되던 해 내가 할 일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했고, 15주년 이후로는 안락사 준비를 생각했어요. (웃음) 제가 <나무를 심은 사람>과 <스노우맨>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전영혁의 음악세계>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으면 했어요. 애청자 중에서 한 사람이 제 후계자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진정한 FM으로 돌아가려면 돈이 아니라 음악에 미친 사람들이 해야죠. 그런데 우리 애청자는 음악은 많이 알지만 인지도가 없어 방송국에서 과연 캐스팅을 해줄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몇 곡이나 전파에 실어 보냈는지 세어보신 적이 혹시 있나요?

(담담히) 오늘이 1월 5일이니까 6181회네요. 곱하기 평균 10곡 하면 대략 맞을 거예요.

영화 잡지에서 일하다보니, 어쩌다 거금의 액수를 접하면 “그 돈이면 영화 몇 편 찍겠다, 몇 편 보겠다”고 무의식적으로 계산을 합니다. 선생님은 시간과 돈을 음반과 음악으로 측정하시겠죠?

음반 구입비는 한 달에 300만원 정도예요. 버는 대로 다 쓰는 거죠. 방송해서 번 돈은 다 음반을 사고 개인 생활비는 원고료로 충당했어요. 1986년부터 1996년까지 5대 메이저 음반사의 해설지를 제가 거의 다 썼거든요. 신문, 잡지의 칼럼도 썼고요. 음반 한 장당 10만원쯤 받고 한 달에 50장 정도를 썼어요. 그러다 11년째부터 건강에 무리가 와서 원고를 안 썼죠.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들한테는 꿈의 라이프 스타일로 들리겠는데요.

부럽긴 하겠지만, 요즘 애들은 그렇게 못 살 것 같아요. 누가 전문가인지 아닌지를 연봉 액수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는 세대니까요. 예컨대 박찬호 선수는 LA다저스에 있었으면 엄청난 기록도 세우고 자동으로 더 많은 돈도 받았을 텐데 스콧 보라스라는 매니저를 만나 ‘장사’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봐요. 진짜 프로는 연봉이 1천만원이라도 잘 던쳐 최고의 투수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제가 한국 최고의 DJ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마 돈은 제가 가장 적게 받을 거예요. 그것에 대한 불만도 없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제 잘못이 아니거든요. 저는 제 잘못이 아닌 것은 신경쓰지 않아요. 전 좋은 음악을 소개하고 적은 청취자들에게나마 최고로 인정받으면 성공하는 거예요. 젊은이들에게는 돈은 1억원이면 그것을 목표로 정해놓고 그것이 채워지면 그 다음부터는 벌지 말고 하고픈 일에 쓰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인생을 적재적소에 쓰도록 신경쓰는 게 중요해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목표를 정했어요. 비틀스가 그때 나왔거든요. 사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왔지만 그땐 제가 아직 목표를 정하지 않았죠. 비틀스 듣고 중1 때 인생의 목표를 정했어요.

확실히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인생에 가속도가 붙죠. 그렇다면 최초로 산 음반도 비틀스였나요?

비틀스의 첫 음반이 제가 처음 산 음반이죠. 수련장, 전과 산다고 엄마한테 거짓말하고 사러 갔어요. 비틀스 음악을 듣고 학교 선생늠들이 왜 고전음악만 들으라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어요. 클래식 아닌 음악도 클래식만큼, 아니 더 좋은 곡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죠.

그 말씀은 클래식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는 의미겠네요.

부자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가족 모두 음악을 좋아했어요. 제 첫 오디오는 아버지의 축음기였어요. 아버지는 클래식, 형은 재즈를 좋아헀죠. <전영혁의 음악세계>에 소개해 히트한 쳇 베이커도 큰형이 제 앞에서 트럼펫 연주를 훙내내던 뮤지션이에요. 음악하면 굶는다고 하던 때라 큰형은 다른 전공으로 고려대에 들어가 연고전 때 브라스밴드로 응원을 했죠. 저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덕에 형이나 누나들과 달리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죠. 형과 누나가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제게 음반을 사다주느라 고생을 많이 했죠.

음악에 둘러싸여 자랐지만 ‘내 음악’으로 적극 발견한 음악은 비틀스가 처음인 셈인가요.

묘하게도 비틀스는 제 학창 시절과 내내 같이했어요. 비틀스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데뷔해 고2 때 해산했죠. <러브 스토리>에 보면 음대생인 제니퍼가 “난 바흐, 모차르트, 그리고 비틀스를 사랑해”라고 말하는데 작가 에릭 시걸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용감한 일이었지만 지금 내로라하는 오케스트라 중 비틀스를 연주 안 한 오케스트라가 어디 있어요? 클래식은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보통 한 뮤지션을 좋아하게 되면 그 음악이 다른 음악의 문을 열어주는데요.

비틀스가 해산했을 때 죽고 싶었어요. 대안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절망했을 때 다행히 나를 구해준 것이 킹 크림슨이었어요. 가 든 데뷔 음반이 딱 그때 나와 바통을 받은 거예요. 록의 역사가 참 극적이었죠! 저도 웃기는 사람인 것이 제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3J –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 처럼 27살에 죽을 줄 알았죠. 군대 다녀와 백수 생활을 할 무렵인데, 27살의 12월 31일 밤 잠도 안 자고 죽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별일 없이 28살의 새해가 와서 굉장히 좌절했고, 이후로는 정상인의 생활을 했죠. (웃음) 그때까지는 미친 듯 음악만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미친 듯한 생활이 역설적으로 후일 제 자산이 됐죠.

결정적으로 음악이 구원이나 위안이 된 기억도 있습니까?

비틀스의 <화이트> 음반이 그랬어요. 지금도 고전음악을 포함한 모든 장르를 통틀어 <화이트>가 최고의 음반이라고 생각해요. 그 음반은 컨셉 자체가 천재적이었어요. 하얀 재킷에 ‘더 비틀스’라고 엠보싱으로 찍어 점자처럼 만져야 알 수 있고요. (동작이 커지고 목소리가 들뜬다.) 게이트폴드식으로 펼치면 네 멤버의 흑백 사진과 곡명이 들어 있고, 비틀스의 사생활에 대한 사진 콜라주와 가사로 이루어진 벽에 붙일 수 있는 종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음반 한 장을 안으면 너무너무 행복해요. 또 그때 음악을 그만하기로 결심한 마지막 음반이기 때문인지 네 사람의 개인기가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천재들의 집대성인 동시에 이후에 등장할 후배들 – 킹 크림슨의 프로그레시브, 레볼루션 9 같은 전위음악, 헬터 스켈터 같은 헤비메탈 음악까지 제시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음악 정보를 어떻게 구하는지도 선생님에 관한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일 텐데요.

음악적 정보. 그게 제일 힘들었죠. 실은 정보를 구하느라 진을 빼서 제가 몸이 약해진 것 같아요. (좌중 웃음) 클래식은 음대도 있고 교수도 있으니 맘만 먹으면 되지만, 팝은 학교도 선생님도 없으니 힘들었어요. 우리나라 전문가들은 다 명동에서 나왔다고들 해요. 무슨 말이냐면, 예전 명동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음반, 잡지가 유통되는 가게가 수십 곳 있었어요. 외국을 나가지 않으면 그 길뿐이었죠. 매일 수업이 끝나면 명동으로 출근을 했어요. 다른 데는 용돈을 쓸 여유도 없었고 쓰고 싶지도 않았어요.

영화사가 첫 직장이셨죠?

저는 한때 음악, 미술, 문학이 제 생활에서 뗄 수 없는 같은 장르라고 생각했어요.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데미안』을 비롯한 헤세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어려서 작고 약한 사람도 성장해 세상에 나가서는 다른 위치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영화도 너무 좋아해서 시험날은 세 편씩 영화를 보는 날이었어요. 첫 직장도 영화를 실컷 보고 싶어 들어간 태창영화사 수입부였죠. 제가 입사할 무렵 홍세미를 캐스팅해 70mm 춘향 영화를 찍은 곳이고 김종원 영화평론가, 이호철 작가가 제 상사였어요.

당시 직접 수입한 영화 중에 어떤 것이 기억에 남으세요?

<닥터 지바고>요. 흥행 보너스도 많이 받았죠. 우선 음악이 무척 좋았고 제랄딘 채플린과 줄리 크리스티 두 여성의 캐릭터가 너무 좋았어요. 당시 제가 수입하려던 영화 중에 레드 제플린의 <The Song Remains The Same>도 있었는데, 군사정권 때라 장발, 퇴폐라고 부결됐죠.

요즘도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자주 영화를 보신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제가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을 무척 좋아해요. 지지난해 부산영화제, 그리고 씨네큐브 앙코르 상영에서 전작을 두 번씩 다 봤어요. 특히 최근작 <울부짖는 초원>은 감독의 모든 능력이 응집된 작품 같았어요. 영화를 보면서 음악 정보도 많이 얻어요. 엘레니 카라인드루 음악도 앙겔로풀로스 영화를 보고 소개했고, 왕가위의 <에로스> 음악도 영화보다 먼저 소개했어요. 어렵게 구한 <룩앳미> 음반에 나오는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제 고등학교 합창단 시험곡이었죠. 반음계가 많아 음치 골라내는 데는 최고거든요.

좋은 음악이라고 판단할 때와 좋은 영화라고 느낄 때 같은 심미안이 작용하나요?

비슷해요. 컴포지션, 콘트라스트, 하모니, 앙상블 등 문학과 음악, 미술은 용어도 똑같다고 봐요. 그리고 그 세 가지가 합쳐질 때 영화가 되고요. 영화도 문학도 음악도 사심 없이 미쳐서 만든 것이 역사에 남아요. 앙겔로풀로스 영화도 혹시 나처럼 가슴 저미며 보는 사람이 없나 뒤돌아보면 반은 자요. (웃음) 그러니까 볼 사람만 보라고 만드는 거죠.

영화사에서 <월간팝송> 편집장으로 이직하셨습니다. 시작은 지인의 제안이었나요?

51 대 49 정도로 음악을 영화보다 좋아했는데 운명이 다가온거죠. 영화사 근무 3년 만에 당시 유일한 음악잡지였던 <월간팝송> 편집장이자 동아방송 DJ였던 나형욱 씨가 이민 가면서 저를 추천해 서른 살에 편집장이 됐어요. 태창영화사 김태수 사장은 흥행 영화를 잘 고르는 저를 내보내기 싫어 엽총으로 위협까지 했었죠. (웃음)

당시 <월간팝송>이라는 잡지를 이끌어간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추억하십니까?

일단 지금보다 음악 듣는 사람이 많았어요. 라이선스는 주로 힙합과 댄스만 나오는 요즘보다 좋은 시절이었어요. 게다가 <월간팝송>은 독점지였으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샀죠. 라디오에서 듣는 음악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리는 걸 잡지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고, 실제로 마니아를 양산했어요.

방금 말씀하신 대원칙은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존재 이유와도 다르지 않군요. 뵙기 전에, 선생님이 해설한 옛 LP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잉베이 맘스틴의 <라이징 포스> 뒷면에는 음악을 발견하고 바로 이튿날 방송에 소개헀다고 써 있더군요.

일본의 전문지 에서는 어떤 무식한 사람이 <라이징 포스>에 0점을 줬더군요. 얼 클루 부류만 듣다가 그런 파격적인 기타를 들어서 그런 거죠. 그 음반을 듣고 바로크 음악을 듣는 듯한 충격을 받았어요. ‘바로크 메탈’이란 말도 제가 만들어 붙였죠. 성음에서는 자기네 소속 뮤지션인지도 모르고 판도 갖고 있지 않아서 제가 판을 빌려주고 해설을 써서 라이선스가 나왔어요. 메탈리카나 팻 메시니도 마찬가지 경우인데, 그런 뮤지션들이 우리 프로를 통해 인기를 얻고 방한해서 게스트로 출연할 때 보람이 컸죠.

<월간팝송>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방송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월간팝송>은 모든 FM 프로그램이 자문을 하는 곳이기도 했는데, 운명처럼 존 레넌이 1980년 12월에 죽었어요. 이상하게도 제 인생엔 그렇게 일이 맞물려요. 당시 <박원웅과 함께>에 존 레넌 추모방송 요청을 받았고, 그 길로 방송 데뷔를 했어요. 그러니까 비틀스는 저의 구원자죠. 제가 그들을 그토록 좋아한 만큼 제게 돌려준 것 같아요.

감정이 격하셨을 텐데, 첫 방송이 기억나십니까?

원고 없이 질문하는 대로 존 레넌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 다음부터 하루에 30분씩 고정 코너를 맡았어요. 그러다가 동시간대 라이벌 프로그램 <황인용의 영팝스>의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박원웅 씨 쪽에서 안 된다더군요. 전 구속하는 사람이 싫어서 박원웅 씨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황인용 씨 프로로 옮겼는데 그때 소개한 주다스 프리스트, 헬로윈, 잉베이 맘스틴, 조지 윈스턴 등이 모두 대박을 터뜨렸어요. 청취율도 <박원웅과 함께>를 눌러 그 공로로 <25시의 데이트>를 맡은 거죠.

가끔 음악 관련 기사를 보면 신인 밴드들이 선생님 프로그램을 요람으로 언급합니다. ‘오메가3’ 같은 밴드는 본인들의 음악을 아예 “<전영혁의 음악세계>풍”이라고 묘사했더군요.

음악인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듣고 공부했다는 사실이 보람 있어요. 고교 때부터 가장 열렬했던 애청자가 신해철인데, 지금 제 프로와 같은 시간대에 방송을 하고 있죠. 방송에서 “전영혁 때문에 음악을 하게 됐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서울대 갈 수 있는 머리인데 만날 밤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듣느라고 서강대 갔다”고 했대요. 음악인은 아니지만 국민 약골 이윤석, 그 친구도 우리 애청자였어요. 연대 간 애들은 다 우리 프로 듣다 서울대 못 간 거고, 서울대 간 애들은 제 프로 안 들은 거죠. (웃음) 김세황, 이현석 같은 기타리스트들도 고교 때 엽서를 보냈고, 블랙홀은 <새벽의 DJ>라는 노래를 제게 헌정했어요.

1990년대 초 대중음악평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분들에겐 대중음악을 비평의 대상으로 끌어냄으로써 예술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숨은 욕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떨까요?

누가 저더러 대중음악평론가라고 하면 나가라 그래요. 대중이 없는 음악이 어디 있죠? 고전음악도 대중음악이에요. 옳은 용어는 장르 구분 없이 뮤직 크리틱, 아니면 뮤직 큐레이터예요. 가요, 팝, 클래식 한 가지밖에 모르면 평론가가 아니죠. 좋은 음악은 하나고, 오직 잘 만들어진 음악과 그렇지 못한 음악이 있을 뿐이지요.

<전영혁의 음악세계>의 선곡 기준은 우선 차트와 무관한 음악, 다른 프로그램에서 소개되지 않는 음악인 걸로 압니다. 그런 희소가치 외에 적용되는 선곡 기준은, 오직 방금 말씀하신 ‘좋은 음악, 잘 만든 음악’ 뿐인가요? 진짜냐 가짜냐는 선생님의 귀로 판가름하는 것이고요?

그렇죠. 오래 하다보니 음반을 보기만 해도 알아요. 저는 (아는 음반은 이미 소개됐다는 뜻이니) 제가 모르는 음반만 사는데, 재킷에 뮤지션의 자존심이 다 들어 있어요. 아무 정보 없이 재킷만 보고 내린 판단이 거의 맞아요. 그리고 곡목을 보면 확신이 서죠. 대개 긴 곡이 좋고요, 10곡 이상 든 음반은 가짜일 확률이 높아요.

그래도 <전영혁의 음악세계> 나름대로 취향의 변천사가 있지 않나요?

처음 방송을 시작한 1986년은 하드록, 록, 헤비메탈이 세상을 지배한 시대였어요. 어떤 음악이든 르네상스가 있고 사이클이 있잖아요. 80년대에는 그쪽에서 잘하는 애들이 나왔고, 90년대 들어 댄스뮤직이 득세하면서 헤비메탈이 쇠퇴해 좋은 음악이 안 나왔어요. 그래서 90년대부터는 ECM 사운드, 크로스오버, 클래시컬한 팝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죠.

현재 30대 중 · 후반들은 선생님 프로그램의 안내로 음악을 발견하고 음반을 구입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보 얻는 경로가 넓고 다양한 형태로 음악을 접하는 요즘 세대가 듣기에는 동시대의 음악이 유적도 아닌데 ‘발굴’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이해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발굴’은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기보다 들을 만한 음악을 골라주는 기능을 뜻하는 것이겠죠?

그게 가장 중요하죠. 사실 음악평론가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감히 평론할 수 없어요. 음악은 생명도 구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어요. 실제로 제 프로를 듣던 재수생들이 자살하려다가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음악이 많은데’라고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들으며 공부해서 대학 간 애들도 있어요. 제가 사람도 많이 살렸죠. (웃음) 음악의 위대함을 알기에 감히 글로 쓰기 힘들어요. 저는 평론가도 디스크자키도 뮤지션이 못 된, 2등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누구보다 뮤지션을 소중히 여겨야죠. 제 임무는 좋은 음악을 만들고도 한 번도 방송에 소개 못 된 사람들을 속속들이 찾아서 소개하고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음악을 글로 평할 수 없다고 믿으셔서인지 선생님이 쓰신 해설을 보면 음악 해석이나 묘사는 거의 없고 정보로 꽉 채워진 건조한 문체입니다.

사람들은 음악평론을 한다면서 독후감을 써요. 그 자체가 음악평론을 못 쓴다는 의미죠.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알고 싶은 건 개인의 감정이나 평론가의 취향이 아니에요. 저는 음반을 산 사람이 알고 싶어할 바이오그래피와 디스코그래피를 기본으로 넣었어요. 평론가는 되지 말고 될 수도 없다, 가이드가 되자고 마음먹었죠.

다른 장르 예술의 비평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평론은 문제가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요. 평론가라기보다 가이드, 큐레이터라는 말이 좋다고 봐요.

그러니까 선생님에겐 방송을 위한 선곡이 곧 비평이겠습니다.

음반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 친한 후배들이지만 음악이 함량 미달이면 아무리 부탁해도 안 틀어요. 그래서 인간관계는 별로 안 좋아요. (웃음) 반면, 자라나는 한국 뮤지션은 꼭 제 돈으로 사서 틀어줘요.

문체도 문체지만 방송 스타일도 극히 건조하십니다. 신변잡기는 물론 없고 음악에 대한 감정적 찬사도 거의 없습니다. 애청자 모임의 박신영 대표에 의하면, DJ의 감흥이 음악을 물들일까봐 염려해서 일부러 그러시는 거라고 하더군요.

음악을 틀어줄 때 선입관을 강요하면 안 돼요. 어떤 DJ는 음악을 들려주기 전에 “명곡 중의 명곡”이라며 5분 이상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도 해요. 만약 음악이 그 해설에 못 미치면 그 프로그램은 권위가 없어지겠죠. 전 먼저 음악을 던지고 각자 느낀 다음 코멘트는 나중에 간단히 합니다. 시 낭송도 마찬가지예요. 철저히 전달자로 남고 판단은 청취자에게 맡기자는 지론입니다.

시 낭송 코너는 <전영혁의 음악세계>에서 유일하게 비음악적인 코너입니다. 어떤 의도로 포함시키셨나요?

예컨대 광복절에 종일 방송을 들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그 얘기만 하잖아요. 그건 싫고 무슨 멘트는 하긴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시는 논픽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초대손님은 프로그램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음악평론을 하시는 송기철씨는 음악적으로는 게스트에게 얻을 도움이 없으니, 일종의 배려라고 표현하시던데요.

예전에 프로그램이 두 시간이었을 때는 초대손님이 있었어요. 사실 그들이 소개하는 음악이 맘에 들진 않았는데 다 우리 애청자들이니까 배려하는 차원에서…… (웃음)

애청자들이 방송 시간을 12시로 복원하려는 운동도 열심히 벌였습니다. DJ로서 12시와 2시의 차이는 어떻게 체감하세요?

사연이 몇 배나 많이 올라와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6시 배철수 씨가 방송하는 6시대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했다면 최고의 인기 프로가 됐을 거라 생각해요. 모든 프로그램의 가요 일변도 현상도 얼마쯤 막았을 것이고요.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편성이 문제예요. 왜냐하면 사람들 귀는 똑같거든요. 좋은 음악은 알아요. 그게 아니라면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소개한 여러 뮤지션의 음반이 왜 많이 팔렸겠어요?

<전영혁의 음악세계>처럼 인터넷의 ‘다시듣기’가 유용한 프로가 없는데, 지금은 ‘다시듣기’가 폐지됐습니다. ‘다시보기’를 하는 TV쪽 이야기도 들어보면, 요즘은 케이블 재방송, 다시보기, 불법 다운로드까지 시청 경로가 다양해져서 시청률의 의미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더군요.

‘다시듣기’를 할 때는 네티즌 사이에 <전영혁의 음악세계>가 청취율 1위였어요. ‘다시듣기’가 없어져 우리 프로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어요. 저작권 단체 쪽에서 프로그램당 받던 저작권료를 방송회당으로 요구했고, 이에 방송국은 응하지 않은 것이죠. 청취자들만 피해를 봤어요. 저희 애청자들이 평균 67년생이에요. 1986년 방송을 시작할 때 고3이었던 애들이죠. 다들 기반 잡고 일하면서 음반을 구매하는 층인데, 듣기 힘든 시간대에 방송을 하니 예약 녹음을 해서 듣는 일이 많아요.

음악산업에 대한 FM의 영향력도 상당히 약해졌죠?

FM이 AM화가 됐으니까요. 1시간에 2곡을 트는 프로그램도 있더군요. 무슨 판을 사고 들을지 정보를 주는 프로그램이 <전영혁의 음악세계>밖에 없으니 시장 불황을 부채질하는 비극적 상황이 왔죠.

음반 매장이 넓어지고 음악을 구하는 경로, 감상이 가능한 공간은 다양해졌는데도 음악 듣는 환경이 풍요로워졌다고 말하기는 힘들군요.

질적으로는 한 30년 후퇴했다고 생각해요. 70년대 초반 LP 시대에는 광화문에서 프라자호텔을 지나 명동으로 가는 지름길에 레코드 가게가 100곳이 넘었어요. 집집마다 주인의 특색이 있어서 한 장씩 사면서 걷는 재미가 대단했죠. 지금은 대형매장에 가면 CD 양은 많은데 우리 프로에 소개할 것은 없어요. 저도 90%는 아마존에서 주문하거나 일본에 가서 사와요.

LP에서 CD, 또 MP3로 음악 듣는 매체도 많이 변했습니다. 선생님이 느끼는 감각적 차이는 뭔가요?

저는 LP를 권하고 싶어요. 유럽에서도 ‘로맨티시즘으로의 회귀’라고 LP를 다시 찍어요. CD의 장점은 잡음이 없다는 건데 저음이 나쁘고 소리가 차가운 단점이 있어요. LP는 잡음이 있지만 포근한, 인간의 정서에 가장 맞는 소리예요. MP3로 듣더라도 정말 좋아하는 음악은 나중에 LP를 사서 턴테이블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안 들렸던 소리가 들릴 거예요. 또 리모컨만 작동하면 비만의 원인도 되고 사람이 매정해져요. 제가 살이 안 쪘잖아요? (일어서서 실연을 하며) LP는 이렇게 판을 꺼내서 먼지도 닦고 끝난 다음에 집어넣는 자체가 운동이 되니 다이어트도 되면서 훈훈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LP만으로 방송하는 날도 있는데 호응이 더 커요.

30대 후반이 청취자 평균연령이라면 10대가 주축이던 초기 청취자가 물갈이되지 않고 프로그램과 같이 나이들며 커뮤니티를 형성한 특이한 경우입니다. 15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려고 공간을 빌리는 데도 관계자 중 애청자가 있어 일이 쉬웠다고 들었습니다. 일종의 ‘음악세계’ 서브컬처가 있는 것 같아요. 핵심 애청자들을 ‘수호천사’라고 부르시죠?

청취자 모임은 유니텔과 네이버, fm25 사이트 세 곳에 있어요. 수호천사는 단순한 회원이 아니라 제가 뽑은 30명의 1967년생들이에요. 제 중매로 결혼한 커플도 있죠. ‘수호천사’가 되면 제가 집으로 불러 식사를 하고 제 라이브러리에서 갖고 싶은 음반을 50장이건 100장이건 뽑아가라고 해요.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정원을 늘려야죠.

아직도 선생님의 손이 닿지 않은 음악이 세상에 많다고 느끼십니까?

물론이죠.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살고 있는 거죠. 전문가는 멈추면 안 돼요. 이만하면 많이 안다 싶어서 걸음을 머무고 가진 걸 퍼내면서 살면 실패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전영혁의 음악세계> 청취자들도 그 점 때문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이죠.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