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올렸던 ‘아프리카 사람들 [1]’에서 이어지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by Franz Fanon)의 서문(by Jean-Paul Sartre)이다.  억압된 분노의 표출, 긴장된 근육의 이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영어권 세계문학 시간에 본 Amandla의 trailer와 함께 보시길.  춤과 음악이 사르트르의 말대로 식민주의적 소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사르트르가 이 글을 쓴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춤과 음악은 ‘몸짓으로 표현한 살인’이라는 면모가 수십년간 발효되어 슬픔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춤추고 노래하는 걸 봐도 눈물이 난다.  Amandla는 ‘승리’라는 뜻.

그리고 아래는 영화 Bamako의 예고편이다.  단어가 어려워서 사실 자막 읽기에 바빴지만ㅠ

 

* * * * *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던져버리자고 말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쓴 책도 아닌데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파농은 자기 형제들에게 우리를 설명해주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소외된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런 관점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 속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처와 사슬을 통해 우리를 안다.  그들의 증거를 논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알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뭇느 소용인가?  그렇다.  유럽은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모국에 살고 있으며, 모국의 폭력을 비난하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이주민이 아니니까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도 나을 게 없다.  이주민들은 바로 당신의 동포다.  당신이 그들을 해외로 보냈고, 그들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도 당신이다.  당신은 이주민들에게 그들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려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겠노라고 경고했다.  혹은 국가의 정부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해외에 파견한 선동가, 불순분자, 첩자가 사로잡힐 경우에는 그들을 부인하겠노라고 말했다.  그토록 자유롭고 인간적인 당신, 문화에 대해 허위에 가까울 만큼 과장된 존경심을 보이는 당신은 정작 자신이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당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학살된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파농은 동지들 – 특히 과도하게 서구화된 사람들 – 에게 모국의 민중과 식민지 대표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용기를 내서 이 책을 읽으라.  그러면 우선 당신은 수치를 느낄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수치는 혁명적 정서다.  당신도, 그리고 나도 자신의 주관적 환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도 역시 당신에게 말한다.  지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으리라고.  유럽인으로서 나는 적의 책을 훔치고, 거기서 유럽의 치유책을 얻는다.  이 책을 최대한 활용하라.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둘째 이유를 보자.  소렐(Sorel ;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 옮긴이)의 파시즘적 주장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파농이 엥겔스 이래 처음으로 역사의 과정을 오늘의 밝은 빛 아래 조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또한 파농이 성미 급한 사람이거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폭력에 관해 흔치 않은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상황을 해석해줄 뿐이다.  그러나 그 해석만으로도 그는 자유주의적 위선이 은폐하고 있는 변증법, 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변증법을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다.

지난 세기에 부르주아지는 노동자들을 탐욕스러운 존재로 보고 그 탐욕을 어쩌지 못해 불법을 저지른다고 여겼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그 짐승 같은 노동자들을 우리 인류 속에 포함시켜주었으며, 적어도 그들을 자유인이라고 간주했다.  다시 말해 노동자도 자신의 노동을 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인간주의는 보편성을 내세웠다.

강제노동의 경우 사정은 반대가 된다.  여기에는 계약이 없다.  게다가 위협과 억압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해외에 나간 우리 병사들은 모국의 보편주의를 거부하고 인류에게 ‘누메루스 클라우수스'(numerus clausus ; 범주 제한 – 옮긴이)를 적용한다.  즉 누구도 자기 동료를 노예로 삼고, 강탈하고, 죽이는 죄를 지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병사들은 원주민이 자기 동료가 아니라는 원칙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바탕으로 이 추상적인 확실성을 현실로 바꾸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합병된 나라의 주민들을 우수한 원숭이의 수준으로 격하시켜 이주민들이 그들을 짐승처럼 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식민지에서의 폭력은 노예화된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비인간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원주민의 전통을 말살하고, 그들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대체하고,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주지 않으면서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온갖 조치가 행해졌다.  신체적인 노역만으로도 그들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하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에게 영혼이 남아 있다면, 공포로 일을 마무리한다.  군인들은 농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민간인들은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에게 매질을 가해 땅을 경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물론 농민이 싸울 태세를 보이면 군인은 즉각 그를 쏘아 죽인다.  농민이 항복하면 그는 스스로 영락하며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수치와 공포는 그의 성격을 분열시키고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자아를 파괴한다.  이 작업은 전문가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에는 ‘심리학적 처우’가 없었고 세뇌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기울였어도 그들의 목적은 어디에서도 달성되지 않았다.  콩고에서는 흑인들의 손을 잘랐고, 앙골라에서는 아주 최근까지도 불만분자의 입술에 구멍을 뚫어 자물쇠를 채우는 짓이 자행되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나는 인간을 짐승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그렇게까지 하려면 인간을 상당히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매질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아 상태를 더 밀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노예제에 문제를 빚게 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길들일 경우에는 산출량이 줄어들게 된다.  일꾼에게 아무리 조금만 준다고 해도 그는 결국 자신이 산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잡아먹게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주민들은 길들이기를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원주민이다.  매질을 당하고, 영양 부족과 질병, 공포에 시달리는 – 물론 어느 정도까지만 – 인간은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늘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즉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딱한 이주민.  여기에 그의 적나라한 모순이 있다.  그는 자신이 약탈하는 사람들에게서 ‘악령’이라는 욕까지 먹어가며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그들을 착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는 살육을 대량학살로, 노예를 짐승 같은 처지로 만들 수 없다.  그레서 그는 통제력을 상실한다.  기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가차 없는 논리에 이끌려 탈식민화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즉각 일어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유럽인의 지배가 지속된다.  사실 그는 이미 전투에서 졌으나 그 점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아직까지 원주민들이 절반만 원주민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원주민들에게 뿌리깊이 박힌 악을 파괴하거나 억누르기 위해 그들을 심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3세대쯤 지나면 그들의 해악적인 본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본능이란 뭘까?  노예들을 부추겨 주인을 살해하게 하는 본능일까?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잔인함이 결국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걸까?  농민을 억압하는 노예제에서는 농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신의 만행에 아무런 치유책도 없음을 모르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절대권력에 사로잡혀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그 절박한 존재는 한때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채찍이나 총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열등한 종족’을 길들이는 일이 조건반사적으로 진행된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 인간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을 근본적이고 완강하게 거부함으로써 현재의 우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3세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두번째 세대는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들이 매 맞는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그들은 평생토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에게 복종심을 안겨주기는커녕 끊임없이 공격성을 강화시켜 견딜 수 없는 모순으로 빠지게 만든다.  유럽인은 조만간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뒤 그들이 자라나서 수치와 굶주림과 고통이 뭔지 알게 되면, 그들은 활화산처럼 분노를 터뜨리게 된다.  그 분노의 힘은 그들을 억압한 힘과 맞먹는 크기다.  그들은 폭력밖에 모른다고 했던가?  당연하다.  처음에는 이주민만이 폭력을 행사하지만 곧 그들도 폭력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거울에 다가가면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반사되는 것처럼 우리가 행사한 폭력이 반사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광기의 분노, 그 쓰라린 원한, 우리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된 그 근육으로 인해 그들은 인간이 된다.  자신들을 짐승처럼 부리려 하는 이주민 때문에 그들은 이주민에 대항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증오.  아직은 추상적이고 맹목적인 증오는 그들의 유일한 자산이다.  ‘주인’은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빚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그 과정을 도중에 중단하지도 못한다.  이리하여 ‘절반의 원주민’은 억압자의 힘과 약점을 통해 짐승과 같은 상태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인간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안다.  그들은 게으르지만 그것은 바로 태업의 한 형태다.  그들은 교활하고 도둑질을 한다.  상상해보라!  그들의 좀도둑질은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저항의 단초를 나타낸다.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 중에는 충포 앞에 맨손으로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유럽인들을 살해하고 총살당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이 되는 사람도 있다.  도적이든 순교자이든 그들의 고뇌는 겁에 질린 대중을 일깨운다.

그렇다.  겁에 질린 대중.  이 초기 단계에서 식민주의의 공세는 원주민들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그 공포는 그들이 우리의 무한한 억압 수단을 마주할 때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겨눈 우리의 총과 그 끔찍한 강제 사이에 갇힌 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그러나 항상 의식하는 것은 아닌 살인의 욕망을 느낀다.  처음에는 그들의 폭력이 아니라 우리의 폭력이 그들을 파괴한다.  이에 대한 피억압자들의 첫 행동은 분노를 깊이 파묻는 것이다.  이 감춰진 분노는 그들과 우리의 도덕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지만 실은 인간성의 마지막 도피처다.  파농을 읽어라.  궁지에 몰린 그들에게 광적인 살인의 충동이 왜 집단무의식의 표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억압된 분노가 배출구를 찾지 못하면 그것은 진공 속으로 밀려들어가 피억압자 자신을 유린한다.  여기서 벗아나기 위해 그들은 심지어 서로를 학살하기도 한다.  부족들끼리 싸우는 이유는 그들이 진정한 적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식민 정책을 잘 이용하면 그들이 계속 다투도록 할 수 있다.  자기 형제에게 칼을 들이대는 사람은 그 행위로써 자신들이 공동으로 타락한다는 혐오스러운 생각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속죄의 희생양으로써 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일을 대신해줌으로써 그들이 기관총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막아줄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는 비인간화를 자발적으로 촉진한다.  이 광경을 즐겁게 바라보는 이주민들 앞에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경계하고, 초자연적인 장벽을 세우고, 때로은 터무니없게 낡은 신화까지 되살리고, 세심한 의식을 치러서 부족마다 결속을 다진다.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깊은 욕구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특정한 계율에 자신을 묶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춤을 춘다.  춤은 그들을 바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수축된 근육을 풀어준다.  그리고 그 춤은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거부, 감히 저지르지 못하는 살인을 몸짓으로 표현하게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영혼의 홀림을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예전에 그것은 신앙심을 신성한 사물과 결부시키는 정도의 매우 단순한 종교적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굴욕과 좌절에 맞서서 싸우는 무기다.  멈보점보(MumboJumbo ; 서아프리카의 토속 수호신 – 옮긴이)와 부족의 모든 우상들이 그들에게로 내려와 그들의 폭력성을 다스리고 무아지경 속에서 완전히 소진하도록 한다.  그와 동시에 이 지체 높은 인물들은 그들을 보호한다.  바꿔 말하면 식민화된 사람들은 종교적 소외를 진척시킴으로써 식민주의적 소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결과 두 가지 소외가 결합되어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정신병 환자는 환각에 사로잡혀 늘 자신의 악마에게 지겨우리만큼 모욕을 당하다가 어느 맑은 날에 자신을 칭찬하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조롱이 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야유와 찬사가 교대로 들리게 된다.  이것은 나름대로 방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자아는 분열되고 환자는 광기에 빠진다.  다른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앞서 이미 말했던 또 다른 주술, 즉 서구 문화를 덧붙이기로 하자.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이라면, 나는 그들의 아크로폴리스보다 내 멈보점보를 좋아할 것이라고.  아주 좋다.  당신은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당신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들이 선택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즉 그들은 둘 다 가져야 하는 것이다.  두 세계, 그것은 두 가지 주술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밤새 춤추다가 새벽이 되면 교회로 몰려가 미사에 참석한다.  갈수록 그 틈은 넓어진다.  우리의 적은 자기 형제들을 배반하고 우리와 결탁한다.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원주민’이라는 지위는 이주민이 식민화된 사람들의 동의 하에 도입하고 유지하는 불안정한 조건이다.

인간의 조건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이 모순은 상당히 폭발적이다.  결국 폭발하고 말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현재는 도화선에 성냥을 갖다대는 시기다.  출산율의 상승이 더 큰 기근을 유발할 때, 새로 온 사람들이 죽음보다 삶을 걱정할 때가 되면 폭력의 급류는 모든 장벽을 휩쓸어버릴 것이다.  알제리와 앙골라에서 유럽인들은 눈에 띄기만 하면 살해된다.  지금은 부메랑의 시기, 즉 폭력의 제3단계다.  폭력은 되돌아와서 우리를 공격하는데, 우리는 과거에 폭력을 시작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는 망연자실해진다.  그들은 우리가 원주민들을 잘 대우하지 않았다면서 늦기 전에 어느 정도의 권리를 그들에게 부여하는 게 현명하고 공정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대단히 배타적인 무리인 우리를 후원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야만적이고 광기에 찬 폭발은 그들에게나 나쁜 이주민들에게나 용서가 없다.  본국의 좌익은 당황한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무자비한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정한 상황을 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반란을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도발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 역시 일방적이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게릴라들은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이다.  자신들도 인간임을 보여주는 최선의 방법이 거기에 있다.  때로 좌익은 그들을 꾸짖는다.  “너무 지나쳤어.  그러면 우리도 너희를 지지하지 않겠어.”  하지만 원주민들은 그들의 지지에 개의치 않는다.  실은 지지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뒤를 봐주는 게 고작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이 엄정한 진실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가 각자 자기 몫을 차지하고 그들에게서 뭔가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증명을 요청할 필요가 없기에, 누구에게도 우호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무이자 목적이 있다.  즉 온갖 수단을 다해서 식민주의를 몰아내는 것이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결국 그 의무를 목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련에서, 인간 이하의 사람들이 인간주의 헌장의 특권을 얻어내기 위해 구사하는 완전히 비인간적인 수단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그 특권을 그들에게 즉각 내준 다음, 그에 결맞은 평화로운 노력을 그들에게 요구하라.  우리들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도 인종적 편견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파농을 읽는 게 좋다.  파농은 그렇게 분출되는 폭력을 분노의 표출로 보지도 않고, 야만적인 본능의 부활로 보지도 않으며, 심지어 원한의 결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나는 우리가 이 진실을 즉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잊었다.  부드러움으로 폭력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오직 폭력 자체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그의 전쟁과는 별도로 우리는 그것을 야만의 승리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체의 의지로 느리지만 확실히 반역의 해방을 실현하며, 그의 내부와 주변에 드리워진 식민지적 암영을 조금씩 걷어낸다.  이것은 일단 시작되면 무자비한 전쟁이다.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거나 남에게 두려움을 주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위선적 존재가 해체되거나, 아니면 통합의 생득권을 쟁취하는 것이다.

농민이 총을 손에 쥐면 낡은 신화는 희미해지고 금제(禁制)는 하나씩 잊혀진다.  반역의 무기는 그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반란의 초기에 그는 남을 죽여야 한다.  유럽인을 쏘아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의 행위다.  억압자를 없애는 동시에 피억압자를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죽은 자와 해방된 자가 남게 된다.  생존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 아래 조국(nation)의 흙을 느낀다.  이 순간부터 조국은 그에게서 멀어지지 않는다.  그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조국은 그와 함께 존재한다.  조국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의 자유와 한몸이 된다.  그러나 그 최초의 놀라움이 물러간 뒤에는 식민지 군대가 들이닥친다.  모두들 단결하지 않으면 학살될 판이다.  부족들 간의 불화는 약해지고 점차 없어진다.  우선 불화로 인해 혁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 불화가 폭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에 있다.  콩고에서처럼 부족들 간의 불화가 남아 있는 경우는 식민주의의 하수인들이 불화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조국은 전진한다.  조국의 자식들이 싸우는 현장 어디에나 조국이 함께 한다.  그들이 서로 간에 느끼는 감정은 그들이 당신에게 느끼는 증오의 정반대다.  그들은 지금까지 적을 죽였고 앞으로도 언제든 다시 적을 죽여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형제다.  파농은 독자들에게 ‘자발성’의 한계, ‘조직화’의 필요성과 위험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매번 고비마다 아무리 중대한 과제가 생겨난다 해도 혁명적 의식은 심화된다.  마지막 콤플렉스는 사라져버린다.  이제는 아무도 우리에게 ALN(알제리 민족 해방군) 병사들의 ‘종속적’ 콤플렉스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눈가리개가 사라지자 농민은 자신의 빈곤에 대해 의식한다.  전에는 그것 때문에 죽을 생각도 했었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자 했다.  이제 그는 그것을 무한한 필요로 파악한다.  민중에게서 샘솟는 폭력, 그들을 5년 동안 – 알제리의 경우에는 8년 동안 – 이나 버틸 수 있게 해준 이 폭력에는 군대, 정치, 사회의 요구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단지 지휘권과 책임의 문제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장차 최초의 평화 기구가 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낸다.  바로 거기에 새로운 전통 속에 자리잡은 인간, 비참한 현재의 후손이 있다.  그는 장차 생겨난, 혹은 현재 포화 속에서 매일 생겨나는 법에 의해 정당성을 얻는다.  이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돌려보내거나, 동화시키고 나면 소수 종족은 사라지고 사회주의로 대체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반역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옛 모국의 예전 주민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리 위해 목숨을 내걸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끈질긴지 보라!  아마 그는 또 다른 디엔비엔푸(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이 참패를 당한 곳 – 옮긴이)를 꿈꾸겠지만, 정말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튼튼하게 무장한 부자들에 맞서 싸우는 빈곤 속의 거지 전사다.  결정적인 승리를 기다릴 때도, 혹은 그런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도, 그는 적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만든다.

패배의 두려움이 없지는 않다.  식민지 군대는 사나워지고, 전국이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소탕 작전이 전개되며, 인구가 이동하고, 보복 전쟁이 벌어져 여자와 아이들이 살육된다.  그도 그것을 안다.  이 새로운 인간은 그것이 끝나면서부터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송장이나 다름없다고 여긴다.  그는 살해될 것이다.  그는 이런 위험을 감수할 뿐 아니라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확신한다.  이 산 송장은 아내와 자식들을 잃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서 생존보다는 승리를 원한다.  승리의 결실을 거두는 것은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너무도 힘들다.  그러나 이 지친 가슴은 믿을 수 없는 용기를 키워내는 뿌리다.  우리가 인간성이 죽음과 절망 가까이에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것이 고통과 죽음 너머에 있다고 여긴다.  우리가 바람을 퍼뜨린다면 그는 소용돌이를 퍼뜨린다.  폭력의 아이, 그는 매 순간 자신의 인간성에서 폭력을 끌어낸다.  우리는 그를 희생시켜 인간이 되었고, 그는 우리를 보고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  그는 더 고결한 다른 인간이다.

 

– 아프리카 [3]에서 계속.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