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피곤에 쩐 상태에서 수업을 듣고있다.  허덕이며 숙제하다 늦게 자고 불행한 표정으로 일어나 학교에 다녀와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 다시 늦게 자는 악순환이다.  그래도 오늘은 뭔가 하긴 한 것 같다는 마음으로 자고싶다.  그래본지도 오래됐고.

Literature in English-speaking World 수업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로서 아프리카가 얼마나 멀게 느껴지냐고 물어보셨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비문학 보고서류 말고, 아프리카 문학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도.  그 당시에는 마이크 레스닉 장편 SF 소설 키리냐가 한 권 있었다.  단 한 권 밖에 없었으므로 기억해내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키리냐가Kirinyaga는 아프리카 케냐Kenya에 있는 성스러운 산의 이름으로, ‘교육받은’ 지식인 코리바가 유토피아를 꿈꾸며 어떻게 주물러보려는 외계 행성의 이름이다.   코리바는 유럽의 고등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이면서 어떻게 시간을 되돌려 원시 부족 국가를 복원해놓고 그것을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고 ‘교육’과 ‘개발/발전’을 동일 선상에 놓은 채 코리바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견해를 가진 등장인물도 있다.  코리바가 키리냐가를 잘 통치하는지 지구에서 감시하는 ‘고위직’ 사람들이다. 

식민지하에서 교육의 혜택과 효과, 교육받은 사람들의 삶의 방향 등을 다른 쪽으로 접근한 작품을 보면 교육과 세계화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Tsitsi Dangarembga가 소설 Nervous Conditions에서 다루는 주제는 몇 가지가 있다.  Zimbabwe가 영국의 지배 하에 있던 시절 자수성가해 영국 학교를 다녀 성공해 금의환향한 Babamukuru의 갈등, 그를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린 시절을 영국에서 보내고 13살에 다시 전통 사회로 돌아온 Babamukuru의 딸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 ‘권위’를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 권위에 대항하는 친척들의 행태, 마을 사람들의 태도 등을 Babamukuru의 조카 Tambudzai의 시점에서 썼다. 

읽으면서 교육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식민지 지배라는 특수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라도 교육은 이미 국가 차원에서 꽉 쥐고 있으려는 요소다.  Babamukuru의 경우처럼 출신과 재력에 의해 이미 갈린 사회 계층 구조를 넘나들 수 있는 기회라도 주는 ‘교육’에 중요성을 부과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힘들게 선을 넘은 다음 잡게 된 힘에 도전하는 세력을 어떻게 대하나?  관찰자 Tambu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등장인물 Babamukuru와 그의 딸 Nyasha의 행동양식으로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재미가 있다.  ‘재미’라고 하기에는 소설이 다루는 인물의 심리, 인물이 속한 사회(system)가 제목처럼 nervous conditions이긴 하지만.

그 제목은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1961년판 서문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문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쓰셨다.  어느 구절에서 따왔는지도 찾고 한문장 한문장 곱씹으면서 읽으려고 집에 있는 책을 펴놓고 옮겨적다보니 좀 많다…  일단 쓰는 데까지 써보겠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1961년판 서문 – 사르트르

얼마 전에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으며, 후자는 그것을 가져다 썼다.  양자 사이에는 돈을 받고 일하는 왕, 영주, 부르주아지, 온갖 야바위꾼, 거간꾼들이 설치고 다녔다.  식민지에서는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모국의 국민들은 진실이 은폐되기를 바랐다.  원주민들은 마치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모국의 시민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유럽의 지배층은 원주민 지배층을 마음대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망한 젊은이들을 발탁하여 붉게 달궈진 낙철로 그들의 이마에 서구 문화의 낙인을 찍고, 그들의 입에는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미사여구를 가득 채워 재갈을 물렸다.  그들은 모국에 잠시 체재하는 동안 하얗게 표백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살아있는 거짓들은 자신들의 동포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고 다만 남의 말을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파리에서, 런던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우리는 “파르테논!  형제애!”라고 외쳤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도 입만 열면 “… …테논!  … …애!”를 외쳤다.  가히 황금기였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입들이 스스로 열렸다.  노랗고 검은 목소리들은 여전히 우리의 인간주의를 말했으나 그것은 우리의 비인간성을 책망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 정중한 분노의 주장을 들으면서 불쾌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뿌듯함과 놀라움을 느꼈다.  뭐라고?  그들이 스스로 말할 줄 안다고?  드디어 우리의 작업이 성과를 거두었도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이념을 받아들이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그 이념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시아를 그리스 문명권으로 만들고, 그리스-라틴 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세계인의 자격으로 우리들끼리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이 마음껏 소리치게 놔둬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풀릴 것이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서 사태를 변화시켰다.  새 세대의 작가와 시인들은 놀라운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가치관과 그들이 살아가는 참된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으며, 그들로서는 그 가치관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그것에 동화될 수도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이렇다.  “당신들은 우리를 괴물로 만들고 있다.  당신들의 인간주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주장하지만 당신들의 인종주의적 조치들은 우리를 차별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식민지 관리들은 헤겔을 읽고 봉급을 받는 게 아니므로 헤겔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양심을 불편하게 하고 모순에 빠지도록 만드는 철학자 따위가 아쉬울 리 없다.  양심의 불편은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놔두자.  아무리 말해봤자 입만 아플 따름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탄식 속에서도 요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차별의 폐지다.  물론 차별을 폐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알다시피 과도한 착취에 의존하는 체제는 결국 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코 앞에 당근만 매달아줘도 죽어라고 달릴 것이다.  그러니 반란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제 정신을 가진 원주민들 중에 고작해야 유럽인들처럼 되기 위해 유럽의 잘난 아들들을 학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그 우울한 사람들의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한 번쯤 흑인에게 공쿠르 상(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 옮긴이)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39년까지는 그랬다.

그럼 1961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쓸모없는 탄원과 역겨운 흉내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이 유럽을 떠나라.  인간에 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거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보이는 대로 인간을 살육하는 이 유럽을 버려라.  수백 년 동안 유럽은 이른바 정신적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성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이 말은 새롭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하는가?  그는 아프리카인, 제3세계인, ‘원주민’ 출신이다.  계속해서 그는 말한다.  “유럽은 지금 무모한 광기에 휩싸여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럽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  쉽게 말해서 유럽은 글렀다는 이야기다.  입으로 말하기에는 썩 유쾌하지 않겠지만 우리 유럽인들 모두가 굳게 확신하고 있는 진실이 아닐까?

그러나 한 가지 유보할 게 있다.  예컨대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 나라는 글렀어”라고 말한다면 – 내 기억으로 1930년 이후에는 거의 매일 그런 말을 들은 듯하다 – 그것은 감정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즉 그들은 애증이 뒤섞인 격한 감정으로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래서 그 말 다음에는 흔히 “이러저러하게 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 의도는 명백하다.  더 이상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장하는 방침이 철두철미하게 시행되지 않을 경우에만, 그럴 때에만 나라가 엉망이 되리라는 이야기다.  요컨대 그 위험의 뒤에는 조언이 따르며, 애국적 상호주관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말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반대로, 파농이 말하는 유럽의 현재 위기는 단순한 경고나 진단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이 의사는 유럽이라는 환자가 기적을 바랄 만큼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고 애써 주장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치료약을 주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이 관찰할 수 있는 징후를 통해 유럽이 죽어가고 있다는 외적 증거를 밝힐 따름이다.  사실 치료제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다.  그는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유럽이 사느냐 죽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책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다소 낭패한 기색으로,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는군!”이라고 중얼거린다면, 여러분은 그 논란의 참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파농은 어느 누구도 대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그의 책에 대해 여러분은 싸늘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여러분에 관해서 말할 뿐 여러분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흑인종도 공쿠르 상을 받았고 황인종도 노벨 상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의 월계관은 이제 끝났다.  프랑스어를 배운 원주민 출신의 청년은 바로 그 프랑스어로 자신의 동포들을 향해 “모든 저개발국의 원주민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있다.  얼마나 황당한가!  과거에는 우리만 말할 줄 알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제대로 된 중재자로조차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낱 대상에 불과하다.  파농은 세티프(알제리 해방 운동의 한 거점이었던 도시 – 옮긴이), 하노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우리가 저지른 범죄들을 언급하지만, 비난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식민주의의 전술, 식민주의자들과 모국 민중을 단결시키거나 분열시키는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동포를 위해서다.  즉 그의 의도는 동포들을 가르쳐 우리가 만든 게임판에서 우리를 이기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제 제3세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다.  물론 제3세계라고 해서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다.  제3세계에는 여전히 예속된 민족들이 많고, 허울뿐인 독립을 얻은 민족이 있는가 하면, 주권을 쟁취하기 위해 지금도 싸우는 민족, 완전한 자유를 얻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민족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식민지의 역사, 다시 말해 억압에서 비롯된다.  모국은 봉건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충분한 대가를 얻어내는 한편, 분할 통치를 통해 원주민 부르주아지,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위선적인 자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모국은 식민지에 이주민(colon)을 보내면서 동시에 식민지를 착취하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유럽은 분파와 반대파를 양산했고, 여러 계층과 때로는 인종적 편견까지도 만들어 냈으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식민지 사회의 계층 분화를 심화시켰다.  파농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 예전의 식민지였던 곳은 우리와 싸우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어쩌면 그 두 가지 투쟁은 사실상 같다고 볼 수도 있다.  투쟁의 열기 속에서 내부의 모든 장벽들은 무너진다.  기업가와 상인으로 구성된 괴뢰 부르주아지, 늘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도시 프롤레타리아, 소도시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민족 혁명군의 든든한 예비대인 농민 대중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된다.  식민주의로 인해 발전이 가로막힌 나라에서는 농민층이 들고 일어나면 순식간에 혁명적 계급으로 부상할 수 있다.  농민들은 노골적인 억압을 겪고,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며, 굶주림으로 죽지 않기 위해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타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민족 혁명이 승리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  그 과정이 생략되어 토착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하면, 신생국은 명목상으로는 주권을 얻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제국주의자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카탕가(콩고 독립 후 심한 내분을 겪었던 콩고 남서부 샤바 지역의 옛이름 – 옮긴이)의 사례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제3세계의 단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결을 이루려면, 먼저 각 나라가 독립을 얻은 뒤에도 예전처럼 농민층의 지도 아래 식민지 민중 전체가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파농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형제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모든 지역에서 한꺼번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쟁취하지 못하고 한 나라씩 혁명이 전개된다면 에전의 식민지 주인들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약점과 불화도 솔직히 드러내며, 신비화하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운동의 출발부터 나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초기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진 곳에서 다시 추진력을 얻으려면 농민들이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타도해야 한다.  독자들이 경계해야 할 대단히 위험한 도깨비불은 지도자나 인물, 서구 문화에 대한 숭배다.  또한 사라져가는 과거 아프리카 문화로 퇴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유일하게 참된 문화는 혁명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성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파농은 큰 소리로 외친다.  지금 이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우리 유럽인들은 분명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식민지 강국이 그의 순수한 마음을 악용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진 우리의 방법으로는 해방을 늦출 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식민주의라는 모국의 나태한 꿈은 다분히 허풍이다.  우리는 ‘제3세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 해도 싸구려 부르주아지에 불과할 뿐이고 식민주의는 이미 제 자리를 잡았다고 믿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키아벨리즘은 우리의 허구성을 낱낱히 밝혀내는 깨어난 세계에 대해서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식민지 이주민은 오직 한 가지, 야만적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 그럴 능력이 있을 경우 – 원주민은 예속과 주권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파농에게 여러분이 그의 책을 읽느냐, 안 읽느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는 자신의 동포들에게 우리의 낡은 술수를 고발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더 이상의 방책이 없다고 확신한다.  그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우리는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좋은 때다.  비제르타(현재 튀니지의 반자르트 – 옮긴이), 엘리자베스빌(현재 콩고의 루붐바시 – 옮긴이), 알제리의 벽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진영은 서로 적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마비 상태를 이용하자.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보편성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식칼이라도 충분하다.”

유럽인들이여, 당신들은 이 책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몇 발자국 나아가면 불 가에 모여 앉은 이방인들이 보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들은 당신들의 무역 중심지와 그곳을 방비하기 위해 고용된 군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당신을 보겠지만 무시해버리고, 목소리마저 낮추지 않고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들의 무관심이 폐부를 찌른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어두운 생명들이며, 당신의 피조물인 그들은 죽은 영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불을 준 것은 분명히 당신이지만, 당신은 그 유령들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아들들이 당신을 무시한다.  불은 그들을 따뜻하게 하고 주변을 밝혀주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밝힌 그 불이 아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니, 은밀한 야행성을 가진 데다 추위에 떠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씩 차례로, 그 그림자에서 동이 튼다.  유령은 바로 당신이다.

아이구야.  이제 졸리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부터는 다음 글에 이어서 쓰겠다.  다시 읽어보니 바바무쿠루와 코리바(주술사 문두무구)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눈에 띈다.  파농이 염두에 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독자는 – 사르트르가 지적했듯 – 아프리카 사람들이고, 사르트르가 쓴 서문은 유럽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썼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이 아닌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사르트르가 파악한 1930~1960년대 식민주의 시대상의 핵심이 마음을 후벼파서 울컥했다.  원래는 Tsitsi Dangarembga가 인용한 nervous conditions라는 구절을 어디서 인용했는지 찾으려는 목적이었는데 왜 여태 못찾았나 보니 우리말로 번역된 걸 읽고있으니 내가 쉽게 찾을 리가 없다.  -_-  사르트르는 처음에 프랑스어로 썼겠고 그걸 영어로 번역한 것을 Dangarembga가 인용했을 터인데…  대체 어딨지?  -_ㅠ

매번 포스트를 산으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사실 아프리카에 대해 쓸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 포스트의 제목에 ‘아프리카’를 쓰기에도 부끄럽다.  아프리카는 나라 이름도 아니고 대륙 이름이니까.  그 안에서 수천만년 전부터 살아온 수천개의 부족에게 있는 다양성을 본의 아니게 일축해버린 것 같아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 건 수업 시간에 Bamako (2006)를 보았기 때문이다.  한 달 전 쯤 강일이네 집에서 google earth를 갖고 놀다가 아프리카 대륙에 Mali라는 아주 큰 나라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Bamako는 Mali의 수도다.  구글 어스에는 기가막힌 자연 경관 사진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런 데로 여행을 가야하는데!’ 였다.  

Daniel DeFoe가 쓴 Robinson Crusoe를 보면,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금요일에 발견한 원주민에게 Friday라고 이름지어준다.  로빈슨 크루소의 피조물이 된게지.  초기낭만주의 시험 문제 중 “로빈슨 크루소가 Friday와 함께 배를 타고 섬을 탈출해 뭍에 닿아 Friday와 헤어질 때 뭐라고 말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몰라서 못썼다. 

정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였다.  아예 그런 장면이 없다.  Friday는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원주민 잡을 때 어떤 작전을 썼는지 그렇게 자세히 썼으면서 정작 나중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그 사실의 중요성significance을 깨달았는지를 묻는 문제였다.  그대로 따라 읽으며 나도 모르게 Friday를 배제했다는 걸 알고는 소름이 끼쳤다.  Uganda의 무장 게릴라 세력에게 납치당하는 어린 아이들을 일컬어 invisible children이라고 했던 미국 청년들의 다큐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은선이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자고 해서 한참 뒤적이던 시절, 내가 알던 아프리카는 ‘말라리아 예방접종 – 부작용 중에는 불임이 있음 – 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전부였다.  세계 인구가 60억명을 돌파한 지금.  우리는 참 그 사람들을 모르고 몰라서,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냥 산다. 

(아프리카 [2]에서는: 이어지는 사르트르의 서문, Chinua Achebe의 Things Fall Apart, 이 책에 대한 New Yorker 기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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