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기술팀 자막보조 자원활동가로 일하면서 인도의 환경운동가이자 핵 물리학자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를 중심으로 유전공학, 생명윤리, 민간농업 방식을 둘러싼 전지구화와 특허권 싸움을 다룬 다큐멘터리 <소똥(Bullshit)>을 보게 되었다.  그 다큐를 보기 전에는 미국의 생명공학 회사 Monsanto와 같은 기업이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GMO가 전세계에서 극빈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희망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다큐를 보고 나서, 왜 반다나 시바가 부족한 힘을 모아 굳이 히말라야의 유기농 재배 농장을 지키려 하는지, 어떻게 지금과 같이 세계화된 지구 사회에 기아와 잉여 생산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이같은 문제에 대한 매체 환경의 영향과 문제의 해결 방안을 생각해 본다.

“20세기 대다수의 사람들이 경제발전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객관적인 필요성으로 인식하여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데올로기로서 성공했다는 실증”이라고 더글러스 러미스(Douglas Lummis)는 지적했다.  제 1세계 선진국들은 고유의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들을 ‘미개발’ 국가 또는 ‘개발도상국’이라 칭함으로써 그 나라가 개발의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양 말해왔다.  실제로 미국은 다른 ‘미개발’ 국가를, 투자하면 이익이 꼭 돌아오는 경제제도로 만들면 매우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남미 여러 나라의 경제체제를 뒤흔들어 놓았다.

우리 나라가 일제 강제점령기의 식민지였을 때 우리 나라 국민들은 우리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착취가 경제발전 이데올로기에 가려져 보이지가 않는다.  단지 우리 나라가 보이지 않게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을 모르는 것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해방 후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입김으로 말해준 제 3세계가 어떻게 착취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쉽게 알아채지 못하게 되었다.  예컨대 남미 커피 원두 생산국은 농작물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체제 속에서 식량부족 문제 없이 지내고 있었으나, 선진국의 커피 수입 수요에 맞추기 위해 경작물 중 커피의 비율을 높이다보니 식용 농작물을 지을 땅이 없어져,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선진국으로부터 비싼 값에 식량을 사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 장 지글러(Jean Ziegler)가 제시한 FAO 평가에 따르면 “이미 1984년부터 세계인구의 두 배에 해당하는 120억의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  결국 기아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야기한 분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알고있다면 콜럼비아, 케냐, 과테말라, 브라질 산 원두로 커피를 만들어 파는 미국의 다국적 커피 전문점에 가서 커피를 선뜻 주문할 수 없을 것이다.  커피는 기호식품이지만 옥수수는 남미 사람들의 주식이다.

나는 대중매체가 이미 널리 보급된 후에 태어났는데도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위와 같은 사실들이 저절로 내 귀에 들린 것이 아니다.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쉽게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대자본의 비윤리적 흐름의 뒷모습은 그렇지 않다.  유달리 사회에 관심이 많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거나, 전지구화와 환경 문제를 주로 다루는 특정 출판사의 출판 목록에서 책을 골랐거나,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다큐를 보고나서야 알았다.  쉽게 볼 수 있는 것보다 노력을 들여 찾아보는 것 중에 꼭 알아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점을 말이다.

이는 반대로 노력 없이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것만 받아들일 경우 ‘꼭 알아야 할 것’을 지나칠 위험을 내포한다.  우유팩 앞면에 붙어있는 파리는 양 옆면과 위아랫면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조금 움직여 그 면과 면이 만나는 모서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설 경우 파리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하다고 한다.  지금 실질적 위험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가 위험 속에 들어왔고, 더 깊은 위험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깨달은 상태라면 이제까지 시도해온 표면적 방법을 버리고 보다 근본적인 전환을 이끌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리를 손으로 막아 모서리를 안보여주려는 세력은 매체가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 세력에게 매체가 잘 이용당하고 있는 셈이다.  파리와, 파리를 막는 손이 같은 평면 차원에 머물러 생사를 같이 하는데도 부분적 강자의 이익을 위한 체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일까?  침묵의 방법으로 편파 왜곡하는 매체의 영향력과 사회 파급 효과는 아프리카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사회 전반에 흘러넘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미 자유 무역 협정 체결 협상 당시 국내 대다수의 언론사에서 자료화면으로 쓴 사진은 김종훈 한국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미국수석대표가 환한 모습으로 악수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다행히도, fact와 truth가 메세지 전달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대중 역시 다소나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매체에게 요구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어느 언론사가 어떤 사건을 보도하는 방식에 있어서 택한 관점이 무슨 의도를 갖고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한눈에 근저를 꿰뚫는 것이 힘들고, 숨겨진 헤게모니의 투쟁을 반박으로 이어나가는 일이 힘들지언정,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의견을 피력하고 있으며 우리가 노력해서 손을 뻗으면 그에 닿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막상 나 혼자 커피 한잔 마시지 않고 매스미디어와 시카고 곡물거래소에게 화를 낸다고 해서 무엇이 나아질 것인지 확신을 못하겠다.  이것은 종전에 내가 느꼈던 무력감과는 차원이 다른 무력감이다.  철학적 인간학 시간에, 인간에 대해 확정적 이론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열어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들었더니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나름대로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본 후 이름 값 하면서 사는 일이 남아있다.  덧붙여, 자유의 현기증을 견딜 만한 깜냥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개방된 물음의 원리(Prinzip der offenen Frage)

철학적 인간학이 개별적 징표로부터 출발하여 전체를 추론해 내려한다면, “인간 전체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등장한다.  즉 철학적 인간학의 결과로서의 “완결된 인간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셸러는 정신적 존재, 플레스너는 탈중심적 존재, 겔렌은 행동하는 존재 등으로 인간에 대해 보편적 형식화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형식화가 너무 성급한 구성물이라고 보고 다시금 격퇴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시대가(또한 개별적 인간이) 생생한 발전 속에서 발견되는 한, 우리는 결코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은 미리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얻어질 수도 없고, 인간에 대한 개별적 특징을 종합함으로써 얻어질 수도 없다.  오히려 그 대답의 유일한 가능성은 그러한 완결된 인간상을 포기하는 것에서 얻어진다.  이것을 플레스너는 “개방되어 있는 물음의 원리”라고 한다.  언제나 새롭고,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 철학적 인간학의 발전을 위한 원리이다. 

– 이원봉 교수님 수업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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